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에서 태동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개념을 단번에 늘어놓기란 어려운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비현실적인 요소를 결합한 문학을 일컫지만, 서구 문화에서도 존재하는 환상 문학, 후기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과 구분 짓기가 만만치 않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효시가 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돼지꼬리를 달고 태어난 아이의 등장을 비롯, 소설 속에 지어진 가상의 국가 ‘마콘도’가 양피지의 예언 해독과 동시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내용까지 서술된다. 정작 마르케스는 서구의 비평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이름 붙인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수사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말이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왼쪽부터)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표 문학 <거미여인의 키스>, <백년 동안의 고독>, <픽션들>

마술적 리얼리즘은 문학뿐 아니라 미술, 영화의 영역으로 가지를 뻗었다. 이는 비현실적인 서술에 대해 어쩌면 필연적일, 이미지화에 대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가장 내재적이고도 심리적인 이야기가 잠재된 서사들을 보다 직관적이고도 독창적인 형태로 가시화해 보이고픈 욕망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어느덧 하나의 보편적인 표현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모양새다. 경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의 중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런 접근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다만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된 모든 문화 예술을 두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명명하기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직면한 온갖 정치 사회적 잡음들, 미국의 간접 지배가 시작된 20세기 중반의 라틴 아메리카는 고유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썼다. 이들은 각종 사회 문제를 아우른 처절한 현실 직시와 함께, 민담이나 신화에서 차용한 환상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태동한 라틴 아메리카만의 고유한 뿌리 찾기를 단지 일개 표현 양식으로 치부해 버리는 건 어불성설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해석되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

마술적 리얼리즘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단어의 문맥적 의미만이 아닌 맥락적 의미를 취하는 것부터라 말하고 싶다. 중심 문화로부터의 콤플렉스를 뿌리로 둔 마술적 리얼리즘은, 국가와 민족의 의미를 뛰어 넘어 계급과 타자,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의 꺾여버린 욕망과 불안에 대해 말해야 한다. 더하여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윤리다. 변방의 타자들을 단순한 신비화 전략으로 소모해버린다면 이들은 관음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고 만다. 훌륭한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변변한 수사로 꾸며낼 수조차 없이, 기묘하게 벅차오르는, 이상한 감흥을 선물할 것이다.

 

<집시의 시간>(1989)

복잡한 역사를 가진 유고슬라비아 출신 감독 에밀 쿠스트리차의 작품이다. 영화 사상 최초로 집시어로 촬영됐으며, 배우들도 실제 집시들에게 맡겼다. 집시의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 속에 사는 청년 ‘페란’(다보아 더모빅)이 부를 얻고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다. 먹고 사는 데 그다지 쓸모는 없었던 페란의 염력은, 후반부 비극적 삶의 고리를 스스로 처단하는 과정에 동원된다. 제42회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페란 역의 배우 다보아 더모빅은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과 <언더그라운드>, <아빠는 출장 중> 등의 작품을 함께했고, 서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성스러운 피>(1989)

칠레 감독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많은 컬트 팬들이 그의 영화에 열광했고, 아티스트들은 그에게서 받은 영감을 고백했다. 온갖 금기에 도전하고 경계 없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등 그야말로 '미친' 영화를 만들어내던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들 가운데 <성스러운 피>는 '그나마' 친절한 영화로 평가된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물론 인생 전체가 폭력으로 가득하다고 믿는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마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남자의 삶을 처절하게 좇는다. 무덤마다 뿜어내는 환한 빛의 출현이나 새의 환영 등 비현실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다. 조도로프스키의 실제 아들이기도 한 배우 엑셀 조도로프스키의 압도적인 연기를 볼 수 있다.

 

<버드맨>(2014)

멕시코의 대표 감독 중 하나인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2015년 국내 개봉된 그의 작품 <버드맨>에서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사례를 만나볼 수 있다. 과거 슈퍼 히어로 영화의 '버드맨'으로 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이 잃어버린 대중의 관심을 되찾기 위해 브로드웨이 연극 연출가로 나선다. 재기를 향한 강박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상이 자꾸만 그를 괴롭히고, 급기야 도시 곳곳을 비행하는 버드맨을 본다. 교묘한 편집을 활용해 쇼트의 구분이 없는 원테이크 무비로 탄생했다.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본상을 모두 휩쓸었다.

 

<판타스틱 우먼>(2017)

떠오르는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의 <판타스틱 우먼>은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칠레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의 영광을 안았다. 영화가 조명하는 대상은 트렌스젠더 여성 ‘마리나’. 마치 그를 괴물 보듯 하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이,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를 죽인 용의자로 무고한 그를 지목하고 만다. 최소한의 애도조차 허용되지 않는 마리나에게 영화는 유령을 데려와 마술적 시간을 선물한다. 실제로 트렌스젠더 배우인 다미엘라 베가의 연기는 폭력과 편견을 견디는 한 여성의 고통에 실존하는 무게를 싣는다.

 

<행복한 라짜로>(2018)

이탈리아의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을 작품세계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현시대 감독이다. 2014년작 <더 원더스>에서는 양봉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살아가는 12세 소녀의 이야기를, 2018년작 <행복한 라짜로>에서는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서 담배 잎을 따는 청년 소작농 ‘라짜로’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소작이 법으로 금지된 시대에 천연덕스럽게 존재했던 이곳에서의 착취. 우직한 청년 라짜로는 성스러운 바보가 되어 영화적 환생을 겪는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성자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 생각 없이 내칠 것"이라고.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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