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게임> 이후 마블이 처음 선보인 시리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스파이더맨의 상대역 '미스테리오'로 제이크 질렌할이 출연했다. 1991년 <굿바이 뉴욕 굿모닝 내 사랑>으로 데뷔한 제이크 질렌할은 '할리우드의 공무원'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영화를 소화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선과 악, 강자와 약자의 모습을 모두 표현하는 그의 얼굴은 배우로서 무기이자 장점이다. 제이크 질렌할의 수많은 필모그래피 중에서 각각 사랑과 슬픔, 집착을 중점으로 담은 영화 3편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랑, <브로크백 마운틴>

<브로크백 마운틴>은 <헐크> <색계>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을 연출한 이안 감독의 작품으로 보편적인 멜로 드라마 구조를 띠고 있다. '낯선 사람을 만나 교감하고 사랑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 때문에 좌절과 아픔을 겪고 결국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 이야기.' <브로크백 마운틴>은 지금보다 성 소수자 권리가 발달하지 않았던 1963년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퀴어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퀴어영화가 드물던 14년 전에 개봉했다. 거의 모든 장면을 움직임 없는 고정샷으로 촬영해 연출자의 감정적 개입을 최대한 줄였다. 영화 크레딧이 흐를 때 울리는 노래 가사는 영화의 주제를 암시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제이크 질렌할은 제59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자유로운 사랑을 갈망하며

카우보이인 ‘잭’(제이크 질렌 할)과 ‘델마’(히스 레저)는 생계를 위해 목장이 있는 곳으로 양을 치기 위해 떠난다. 모르는 사이였던 둘은 문명이 제한된 광활한 자연 속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며 속마음을 털어놓고 서로 의지하게 된다. 추운 어느 날 한 텐트에서 몸을 녹이던 잭과 델마는 사랑을 나눈다. 잭은 델마에게 같이 목장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내자고 제안하지만, 약혼녀가 있었던 델마는 사회적 인식이 두려워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선을 유지한 채 4년 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잭과 델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델마와 헤어질 때 아쉬운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던 잭의 표정과 잭의 부재를 느끼며 가슴 아파하는 델마의 얼굴은 이들 사랑이 얼마나 처연했던지를 드러낸다. 영화 크레딧이 흐를 때 울리는 노래 가사는 영화의 주제를 암시한다.

“사슬을 끊고 너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조물주는 또 다른 사슬을 만들어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네. 너를 향한 사랑의 눈금을 더 높이 그어가네. 너를 잊지 않으려고. 하지만 조물주는 더 높이 금기의 벽을 쌓아가네. 사랑은 언제나 슬픈 것. 오 주여, 저는 압니다. 저는 압니다. 당신만이 내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걸. 그것이 내게는 또 한 굴레라는 걸.”

 

 

슬픔, <데몰리션>

HIV 바이러스 감염자의 일상을 그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과 홀로 PCT 종주를 떠난 셰릴의 이야기를 담은 <와일드> 감독인 장 마크 발레가 연출했다. <데몰리션>은 누군가가 죽고 나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영화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결코 상투적이지 않다. <데몰리션>은 엉엉 울부짖으며 드러내는 슬픔이 아닌 꾹꾹 눌러 목구멍으로 삼킨 감정에 몰두한다. 주인공은 겉으로 보기엔 담담하지만 죽음이 초래한 변화에 가장 섬세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한마디 말없이 눈빛만으로도 내면의 갈등을 표현할 수 있는 제이크 질렌할이 주인공을 맡았다. <브로크백 마운틴>과 달리 핸드헬드 기법으로 작품의 현실감을 극대화하며 극 중 인물들의 감정에 동화되도록 촬영했다.

 

죽음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

하루아침에 아내를 사고로 떠나보낸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 보통 사람과 달리 데이비스는 차분하다 못해 담담하다. 남들처럼 슬픔을 표출하기보다 죽음이 발가벗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여태껏 살아온 평탄했던 삶이 어딘가 잘못 조립한 가구처럼 삐끗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일상을 분해하기 시작한다. 눈치 보던 처가부터 잘 다니던 회사 생활까지 얼렁뚱땅 맺었던 관계들을 재정립하고 심지어 살던 집까지 때려 부순다.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본모습을 이해해주는 친구를 사귄다. 데이비스는 감정 파노라마가 크레이프처럼 슬픔과 사랑, 공허함과 갈망, 분노와 설렘 등 모호한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사람이다. 제이크 질렌할는 쉽게 지레짐작할 수 없는 데이비스의 속내를 관객이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도록 연기했다.

 

 

집착, <조디악>

<세븐> <파이트클럽> <소셜 네트워크>를 연출한 데이빗 핀처의 작품으로 어벤져스 일원인 <헐크>의 마크 러팔로,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제이크 질렌할과 함께 출연했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좇는 주인공들을 우직하게 156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 동안 보여준다. 당시 로튼토마토닷컴에서 신선도 85%를 기록했으며 실제 있었던 연쇄살인범과 살인사건을 다뤘다. 데이빗 핀처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화려한 화법보다는 촘촘한 서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스릴러 영화다. <나이트 크롤러>에서 특종에 집착했던 제이크 질렌할은 <조디악>에서 살인마에 집착한다.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조디악이라 자칭하는 범인은 편지로 범행 관련 정보가 담긴 암호를 각 언론사에 뿌린다. 우연히 이를 접한 신문사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홀)는 암호 해독에 흥미를 느끼며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다. 로버트뿐만 아니라 형사인 ‘데이비드’(마크 러팔로)과 기자 ‘폴’(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각자의 위치에서 범인을 찾지만 검거가 쉽지 않다.

 

한계까지 밀어붙이다

연쇄살인범 행적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지만 정작 영화 후반부까지 범인은 머리카락 한 올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보이지 않는 범인과 지난한 심리전을 펼치며 지쳐가는 주인공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일상이 망가진 폴과 계속된 수사 실패로 데이비드는 추적을 멈춘다. 하지만 그레이스미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건을 파헤친다.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기보다 차분히 가라앉은 제이크 질렌할의 집착 어린 눈빛은 영화 내내 묘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Writer

망원동에서 사온 김치만두, 아래서 올려다본 나무, 깔깔대는 웃음, 속으로 삼키는 울음, 야한 농담, 신기방기 일화, 사람 냄새 나는 영화, 땀내 나는 연극, 종이 아깝지 않은 책,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