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발렌시아가의 선택을 받은 로버트 야거. 앵글을 꽉 채운 경직된 모델들과 그들을 감싼 빛바랜 모노톤은 분명 이전 발렌시아가 캠페인들과 확연히 다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가 가진 독특한 이력과 개성 강한 작품들은 진입 장벽이 높은 하이패션계에 신선한 영감으로 다가왔다. 영국 런던 출신의 그는 90년대 초, 로스엔젤레스의 뒷골목을 주 무대로 한 라틴계 갱들의 삶을 촬영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도시의 어두운 현실을 날카롭고 가감없이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고, 후에 보도 사진과 잡지, 락스타의 전속 포토그래퍼를 거쳐 마침내 하이패션까지 그 활동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였다. 거리의 갱들과 정계의 유명인사들, 락스타와 모델들까지. 작가가 깊이 매료되었던 피사체들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로스앤젤레스의 갱들

1980년, 로버트 야거는 모국인 영국과 멕시코를 횡단하며 라틴 아메리카 문화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긴 뒤 사진 공부를 병행하던 도중, 갱들의 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수수께끼 같은 세계 속에 발을 디디기로 한 그의 대담한 결정은 미국 내 지역 사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갱들의 사진을 찍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아찔한 경험담을 고백했다. 갱과 경찰 사이에서 협박과 정보 제공을 강요받는 게 일상이었던 그는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갱단의 한 남자가 리볼버를 그의 가슴의 겨누며 협박했을 당시, 자신의 품에 있던 카메라를 남자에게 내밀며 사진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진심을 호소했고 덕분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Clover’s Playboys tattoo', 이미지 출처 - 'Photoloco'
'Fresh tattoo', 이미지 출처 - 'Photoloco'
'Mad-dog challenging stare', 이미지 출처 - 'Photoloco'
'Playboys Gang mural', 이미지 출처 - 'Photoloco'

마약과 권총, 돈다발, 무자비한 폭력 속에 뒤얽힌 분노의 찬 표정들. 그는 잔인한 갱들의 생태계를 담담히 담아내면서도, 그 세계 속에 숨어있는 인간적인 면들을 놓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처럼, 얼룩진 생애 속에서도 변치 않는 절대적 가치를 포착해 낸 것이다. 평범한 삶 속에선 불가해한 그들만의 규칙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까지도 존중하며, 그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체감하기 위해 그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이는 수많은 경멸과 핍박 속에서 무가치하다 여겨질 수 있었던 삶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대변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미지 출처 - 'Monster Children'
이미지 출처 - 'Monster Children'
이미지 출처 - 'Monster Children'
이미지 출처 - 'Monster Children'

 

정계 인사와 유명인들

이런 작가의 모험심과 패기는 여러 유명 매체들의 구미를 자극하였다. 그는 뉴욕 타임즈와 타임, 인디펜던트와 같은 잡지에 실릴 보도용 사진을 의뢰받았고, 여러 정계 인사들과 기업가들을 촬영하게 되었다. 현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는 차별 없이 모든 대상에게 그대로 적용되었고, 역사적인 순간들은 그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해석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부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George W. Bush with Karen Hughes, Andy Card, Dick Cheney, John Ashcroft', 이미지 출처 - 'Photoloco

많은 유명인 역시 그의 카메라 앞에 서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유명세라는 거품을 뺀 스타의 이면을 사진 속에 담길 원했고,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이견없이 그의 요구를 따랐다. 평소 보지 못했던 편한 차림과 클로즈업 위주로 진행된 작업은 작가와 피사체 사이의 신뢰와 친밀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러준다.

'Gwyneth Paltrow', 이미지 출처 - 'Photoloco
'Robert Pattinson', 이미지 출처 - 'Photoloco
'Tom Waits', 이미지 출처 - 'Photoloco
'Snoop Lion', 이미지 출처 - 'Photoloco

 

van halen과 balenciaga

2007년, 미국의 뮤지션 van halen의 전속 포토그래퍼로 발탁되며 그의 커리어엔 또 다른 장이 펼쳐졌다. 증폭된 에너지가 가득한 공연의 풍경을 그의 주특기인 흑백의 색감으로 담아냄으로써 야생마와 같은 락스타의 모습을 사각의 틀 속에 완벽하게 가두었다. 최근의 그는 2019년 발렌시아가의 캠페인을 촬영하며 얼마나 다양한 피사체와 교감할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했다. 그가 저명한 포토그래퍼들을 제치고 발탁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측 불가능한 대상들을 만나며 더욱더 폭넓어진 그의 통찰력, 즉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받아들이려 했던 그의 솔직하고 진심 어린 시선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fashiongonerogue'
이미지 출처 - 'fashiongonerogue'

로버트 야거, 그의 사진 세계 역시도 그가 찍었던 대상들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피사체와의 교감이 사진의 전부라고 말하는 그의 사진 철학은, 피사체 스스로가 기꺼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서고 싶게 만든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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