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전국이 떠들썩했다. 이번 칸 영화제의 수상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평론가와 기자들이 <기생충>과 함께 유력한 수상작으로 예상한 작품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페인 앤 글로리>(2019)다. 

<페인 앤 글로리>의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운데)와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왼쪽), 안토니오 반데라스(오른쪽), 출처 - imdb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특히 그의 작품 속 화려한 색감은 한번 보면 잊기 힘들다. 원색을 잘 사용하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건 붉은 색이다. 과감한 설정으로 욕망을 풀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을 보고 나면, 욕망은 선명한 붉은색일 것만 같다. 감각적인 화면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을 품은 그의 따뜻한 시선까지 더해졌기에 여전히 많은 관객이 그의 작품을 기다린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다양한 색으로 풀어낸, 매혹적인 작품들을 살펴보자.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간호사 ‘마누엘라’(세실라 로스)는 작가를 꿈꾸는 아들 ‘에스테반’(엘로이 아조린)과 함께 마드리드에 살고 있다. 마누엘라는 에스테반의 생일을 기념해서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러 간다. 에스테반은 연극이 끝난 뒤에 배우 ‘위마’(마리사 파레데스)의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리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마누엘라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에스테반의 일기장을 보고, 에스테반이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는 걸 알게 된다. 마누엘라는 여장남자가 된 남편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간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은 제52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제7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 ‘베티 데이비스, 지나 롤린스, 로미 슈나이더, 모든 여배우들, 연기하는 남녀 모두, 여자가 된 남자들,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모든 여자들, 그리고 내 어머니께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올라온다. 즉,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여배우부터 여자가 된 남자들, 어머니까지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모든 이들을 보듬어주는 인물은 마누엘라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트레일러 

마누엘라는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위로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각자의 사정으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이 마누엘라를 중심으로 연대한다. 슬픔부터 소외, 외로움 등 수많은 감정이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함께이기에 견딜 수 있다. 자신도 힘들 텐데, 오히려 상처받은 타인에게 먼저 손을 뻗고 위로하는 마누엘라는 ‘숭고하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녀에게>

간호사 ‘베니뇨’(하비에 카마라)는 코마 상태의 ‘알리샤’(레오노르 와틀링)를 몇 년째 돌보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기자로 일하는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는 투우사 ‘리디아’(로자리오 플로레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리디아는 투우 경기 중 일어난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진다. 베니뇨와 마르코는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뒤 가까워지는데, 두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그녀에게>(2002)는 제7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작품이다. 잘 짜인 이야기만큼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음악과 함께 독일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공연이 등장한다. 영화 중간에는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1997)에도 등장했던 ‘쿠쿠루쿠쿠 팔로마’를 브라질 뮤지션 카에타노 벨로소가 직접 등장해서 부른다.

<그녀에게>는 영화 중간중간에 ‘베니뇨와 알리샤’처럼 인물들의 관계를 소제목처럼 언급하는, 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베니뇨가 알리샤를 사랑하는 마음을 마르코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베니뇨의 집에 머물면서 베니뇨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낀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은 베니뇨는 마르코의 여행 서적을 읽으면서 여행하는 기분을 느낀다. 둘은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낯선 곳을 여행할 때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녀에게> 트레일러

마르코는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옛 연인을 떠올리며 운다. 자신이 보고 있는 아름다운 걸, 그 사람에게 공유할 수 없다는 게 슬퍼서 운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어떤 감정을 배우기도 한다. 마르코는 앞으로 어떤 순간마다 자신의 삶에 머물렀던 베니뇨, 리디아, 알리샤를 떠올릴 거다. 태어났을 때부터 나의 것이었을 것 같은 감정 중 얼마나 많은 게 관계로부터 빚을 진 걸까.

 

<나쁜 교육>

영화감독 ‘엔리케’(펠레 마르티네즈)는 자신의 신학교 친구이자 첫사랑이었던 ‘이그나시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와 재회한다. 이그나시오는 배우로 활동 중이라는 근황을 전하며, 자신이 쓴 ‘방문객’이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를 엔리케에게 준다. 엔리케는 자신과 이그나시오의 어린 시절이 담긴 시나리오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나쁜 교육>(2004)은 팜프파탈을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인물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는 누아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아모레스 페로스>(2000),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이 투 마마>(2001) 등에 출연했던 멕시코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옴므파탈로서 활약한다. 이그사니오의 시나리오 제목 ‘방문객’처럼, <나쁜 교육>의 갈등은 ‘방문’에서 시작한다. 

<나쁜 교육> 트레일러

<나쁜 교육>은 인물들의 욕망이 서로를 갉아 먹는 이야기다. 그 어떤 인물도 선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일 뿐이다. 각자의 욕망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 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나쁜 교육’이 되어서, 상처 입은 자들은 자신이 받은 것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욕망’은 나쁜 단어가 아니지만, <나쁜 교육> 속 인물들을 방문하는 욕망은 하나 같이 악하다.

 

<귀향>

부모를 잃고 고향 라만차를 떠나 마드리드에서 살고 있는 자매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와 ‘솔레’(로라 두에나스). 라이문다는 잡일을 하며 무기력한 남편과 딸 ‘파울라’(요하나 코보)를 먹여 살리고 있고, 솔레는 불법 미용실을 운영 중이다. 어느 날, 솔레는 라만차에 사는 이모의 장례식에 가고 이곳에서 ‘어머니’(카르멘 마우라)의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귀향>(2006)은 제59회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영화에 출연한 6명의 배우는 공동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귀향> 속 고향으로 묘사되는 라만차는 실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고향이다. 어떤 아픔 때문에 고향을 떠난 이들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이다.

<귀향>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유령에서 생겨난다. 마을에 어머니의 유령이 떠돈다고 하고, 실제로 영화에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 존재가 유령인지 실재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 믿어도 마음 아픈 해석이 된다.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유령처럼 숨어 산다는 거고, 유령이라면 죽어서도 누군가를 위해 떠돌아다니는 거니까.

<귀향> 트레일러

아픔 때문에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필요한 건 마음의 회복이고, 이를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아준다. 이들의 맞잡은 손이 만든 위로의 공동체는 고향보다 작지만, 고향이 줄 수 없는 큰 위로를 만들어낸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