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분명한 것보다 불명료한 것에 이끌릴 때가 있다. 쉽고 익숙한 일상보다, 난해한 환상이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서 나를 마중 나온 ‘흰토끼’처럼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해외 신보들을 모아봤다.

 

차가운 무의식의 세계 - Thom Yorke <ANIMA>

톰 요크에 대해 이름 외에 다른 어떤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할까? 1985년 결성 이래, ‘21세기의 비틀스’ ‘핑크 플로이드 이래 가장 성공한 아트록 그룹’ ‘디지털 혁명의 언더그라운드 선구자들’ 등으로 불리며 현역 밴드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라디오헤드의 수장이라 하면 될까? 대중음악의 시대, 가장 대표적인 천재 중 한 명이라고 하면 될까? 그는 언제나 누구보다 실험적인 음악을 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대중적인 인지도와 지지를 등에 업은 인물이다.

‘Not The News’

그런 그가 솔로 앨범을 5년 만에 발표했다. 앨범 제목 ‘ANIMA’는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사용한 개념어로, ‘행동의 근원이 되는 내면의 자아’ 또는 ‘남성의 무의 속에 잠재한 여성적 심성’을 뜻한다. 앨범마다 난해하고 혁신적인 사운드로 청자를 라게 하는 톰 요크는, 이번 앨범 역시 인간 내면의 불안과 디스토피아를 그만의 디지털 추상화로 완성하기 위해, 날카롭게 튀는 사운드 소스들과 어두운 코드, 댄서블한 리듬을 두루 활용했다.

<ANIMA> 예고편

게다가 톰 요크는 이번 앨범을 통해 영화계 젊은 거장 폴 토머스 앤더슨과 협업했다. 앤더슨은 <마스터> <매그놀리아> 등으로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뿐 아니라, 1990년대 애플의 여러 뮤직비디오를 연출함으로써 음악에서도 빼어난 안목을 보인 인물이다. 앤더슨이 연출하고, 요크가 출연 및 OST를 삽입한 동명의 단편영화 <ANIMA>는 음악 못지않은 난해한 서사와 감각적인 영상미를 뽐내며, 이를 감상하는 우리를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무의식의 세계로 초대한다. 앞서 톰 요크는 최근 국내 개봉한 실험적인 호러 영화 <서스페리아>의 음악을 맡기도 했다. 그의 이번 앨범 수록곡들은 오는 7월 28일, 최초로 진행하는 단독 내한 공연에서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Suspirium’

 

가지런한 꿈의 세계 - Leif <Loom Dream>

꿈은 우리의 무의식이 가장 선명하고도 환상적으로 드러나는 형태일 것이다. 일렉트로닉 뮤지션 레이프(본명 : Leif Knowles)가 4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정규앨범이 바로 이 꿈을 주제로 한다. ‘Loom Dream’라는 앨범 제목만 해도 직역하면 꿈을 직조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차갑고 분열된 이미지의 낯선 사운드 소스를 리얼 타악기와 따뜻한 코드를 활용해 재조립한 <Loom Dream>의 앰비언트 사운드는 마치 꿈을 가지런하게 직조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Myrtus’

레이프는 15년 넘게 활동 중인 일렉트로닉 DJ이자 프로듀서다. 그는 활동 초기에 소박한 하우스 스타일로 출발했지만, 이후 테크노와 정글, 베이스 뮤직까지 다양한 스타일을 섭렵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켜 작금에는 남다른 미래지향적 관점과 사운드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앨범 역시 꿈결 같은 분위기와 단정하고 목가적인 인상이 공존한다. LP의 ‘Side A’와 ‘Side B’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트랙은 그 제목을 허브 식물에서 따왔다.

‘Taraxacum’(2015)

재미있는 사실은, 이와 같은 작품 경력에도 불구하고 레이프가 스스로 DJ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일렉트로닉 오디오/비디오 페스티벌로 명성이 높은 영국 프리로테이션 페스티벌에 매년 참여하는 핵심 멤버이자 레지던트 DJ며, 바이닐 레이블 UntilMyHeartStops의 공동 수장이기도 하다. 레이프의 음악적 주관은 디제잉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그의 DJ 셋은 듣는 사람 모두가 플로어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들게끔 유난히 긴 워밍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Dinas Oleu’(2013)

레이프 페이스북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추억의 세계 - Helado Negro <This Is How You Smile>

깊은 무의식을 끄집어내거나 불명료한 꿈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환상은 뜻밖에 우리 주변에 위치한다. 헬라도 니그로(본명 : Roberto Carlos Lange)는 그의 여섯 번째 정규앨범 <This Is How You Smile>에서 절대 다시 올 수 없는 지난 추억을 환기한다. 자메이카 킨케이드(Jamaica Kincaide)의 단편소설 ‘소녀’에서 모티프를 차용한 이 앨범은, 소설처럼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추억의 공간과 정서, 정체성의 문제를 건드린다. 앨범 커버도 그가 어렸을 때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Running’

아무리 미화 과정을 거쳐도 바꿀 수 없는 유년의 어두운 기억들이 존재한다. 누군가의 기억은 오로지 억압과 불안, 폭력으로만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에콰도르 이민자 가정으로 태어난 그 역시 일상의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This Is How You Smile>은 이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뒤바꾼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이 밝고 긍정적인 메시지로 점철된 것만은 아니다. 개인적이고 정치적이지만, 동시에 서정적이고 몽환적이기도 한 독특한 음악의 에너지가 이를 대변한다.

‘Pais Nublado(흐린 나라)’

아방가르드 팝을 지향해 보컬과 함께 직접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 비주얼 아트에도 일가견 있는 헬라도 니그로의 다재다능함은 비교적 일찌감치 완성되었다. 청소년 시절, MTV에서 방영하던 <Liquid Television>을 본 그는 아트 비디오와 애니메이션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고, 이를 직접 제작해보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대학에서 컴퓨터 아트 및 사운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각종 실험적 사운드 및 아트 쇼에 참여했으며 최근에는 미국 예술가 협회(United States Artists Fellow)와 현대 미술 재단(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s)에서 음악 부문 예술가상을 받기도 했다.

'It’s My Brown Skin’(2016)

헬라도 니그로 홈페이지

 

Writer

끊임없이 실패하고도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 나를 어리석게 하는 모든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것들의 총체가 곧 나임을 믿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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