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디즈니 혹은 픽사 영화를 볼 때마다 크레딧에서 한국 사람들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한국인’인 것 같은 이름을 찾았을 때, 괜히 반갑고 으쓱하는 마음을 가지곤 했다. 새삼 ‘이렇게 많은 한국인 애니메이터가 필드에서 일하고 있었구나.’라는 감동을 함과 동시에, ‘왜 이 애니메이터들은 저기 먼 땅 미국까지 가서 일해야 했을까?’, ‘그곳이 왜 한국이 될 수는 없었을까?’라는 현실적인 생각에 잠기곤 했다.

연상호 감독이 영화 <부산행>을 제작했을 때, 많은 사람은 그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했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그리고 본래도 작품성으로 입소문을 탔던 그의 <돼지의 왕>과 같은 애니메이션이 비로소 대중들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 밖에도 홀랜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창백한 얼굴들>의 감독 허범욱은, 한국이라는 이 땅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에 대한 (놀라우리만큼)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이 글에서 그 고충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대신,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아름다움의 새 창을 활짝 열어젖힌 특별한 애니메이션 감독을 소개하고 싶다. 감성적인 색감과 느낌 때문인지 자꾸만 ‘한국의 신카이 마코토’로 불리지만, 그는 자신은 ‘한국의 한지원’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분명히, 그는 누구에게도 비교될 수 없는 ‘한국의 한지원’이다.

그가 작업한 아름다운 작품들을 소개한다. 보다 보면 너무 뭉클해질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것이 좋겠다.

 

1. <뭐든 될 수 있을거야>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빛나는 눈에 별을 담았고, 팔랑이며 바람에 따라 나는 종이 만큼이나 자유롭게 하늘을 유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우주비행사 대신, 우주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그녀가 못다 한 꿈은 손녀가 이어받았고, 그녀는 할머니의 꿈을 함께 꾸며 지구의 모습을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된 손녀는 또다시 그 꿈을 자신의 손녀에게 전한다. 그리고 영상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1분 30초 정도의 짧은 이 영상은 스톤헨지 브랜드의 광고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삼대에 걸쳐 전해지는 꿈들은, 지금도 각자의 꿈을 품고 있을 여성들에게 속삭인다. 우리는 꿈을 꿀 수 있고, 이룰 수 있고,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그 꿈들은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 안에서 여성들은, 꿈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꿈을 꾸는 인간의 모습으로 함께 살아간다.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음악은 ‘정우’라는 뮤지션이 불렀다. 많은 사람이 정식 음원을 요청할 정도로 맑고 단아하고 힘 있는 그의 목소리는, 이 애니메이션과 놀라울 만큼 잘 어울린다. 한지원 감독은, 정우의 목소리를 듣고 애니메이션에 추가한 장면이 있을 만큼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지키지 못했던 나의 바람 소리였나요
나 닮지 못한 어린 달빛만이
난 가까운 데서 당신을 잃어도 봤구요
아주 먼 데서 안아도 봤어요
당신이 늘 깨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나는 걱정 없이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가사와 음악, 그리고 아름다운 색감과 스토리텔링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뭐든 될 수 있을거야>(2019), 확 불타오르는 열정이 아닌, 잔잔하면서도 내 안에 오래 머무르는 열정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느껴보면 좋겠다. 인생에서 단 1분 30초의 시간을 내주길.

 

2. <딸에게 주는 레시피>

한지원 감독의 역량은 다른 애니메이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네이버 그라폴리오, 독서 앱 ‘밀리의 서재’,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웹 애니메이션 공모전에 당선된 <딸에게 주는 레시피>(2018)는 공지영 작가의 동명 에세이를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역시 1분 30초 내외로 짜인 각 에피소드는, 어머니가 딸에게 알려주는 레시피와, 그에 따른 따뜻하고 아름다운 글귀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뻔하고 밋밋해 보일 수도 있는 단편적인 메시지는, 한지원 감독 특유의 빛과 분위기 속에 어우러져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선사한다.

크지 않은 동작과 화려하지 않은 서사 속에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 나오기 쉽지 않은 만큼, 한지원 감독의 실력은 이로써 드러난다. 그는 장면화에 뛰어나며, 그 장면화를 그 어떤 매체도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뚜렷이 가지고 있는 작가다.

딸에게 주는 레시피는 화를 두고 연재되는 작품이다. 한 화 한 화가 너무나 아름답고, 제각기 다른 이유로 우리를 미소짓게 만든다.

 

3. <생각보다 맑은>

한지원 감독은 <생각보다 맑은>(2015)이라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으로 극장 데뷔를 한 바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두식, 남자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은 은솔, 꿈과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충돌하는 강보와 예미. 주인을 따라 학교에 가는 길에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경험하는 푸들 마로. <생각보다 맑은>은 이렇게 네 가지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을 엮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영화를 모두 보고난 뒤에는 역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제각각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놓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일상’이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비극이 일어난다 해도, 그를 담고 있는 ‘일상’을, 이 애니메이션들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비극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잔잔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다. 이 흔들림 없는 일상 속에서 인물들은 삶을 견디어 내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다.

<생각보다 맑은>은, 이 네 가지 이야기가 모두 구성되었을 때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다. 꿈과 사랑, 의지에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관객에게 속삭인다. 우리는 우리만의 일상을 살고 있으며, 남들은 결코 흉내를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지원 감독의 작업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가 그려낸 인물들을 사랑한다. 그 인물들에게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닌, 유일한 한 사람을 위한 ‘아름다움’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그는 준비해둔다.

그 스포트라이트를 기꺼이 바라보고 싶다. 왠지 그 빛 안에 들어서면, 몇 도는 더 따뜻해질 것 같다.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