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이는 영화음악 감독의 이름이 낯익을 때가 있다. 극장 오는 길에 들었던 음악 플레이리스트 속 뮤지션의 이름을 엔딩 크레딧에서 발견하는 건 이제 낯선 일이 아니다. 퍼렐 윌리엄스는 거장이라고 불리는 음악감독 한스 짐머와 함께 <히든 피겨스>(2016)의 음악을 맡았고,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 린 램지 감독의 작품에서 여러 번 음악을 담당했다. 현재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달파란, 방준석, 모그 등의 영화음악 감독들도 출발은 뮤지션이었다. 

영화관에서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듣는 건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영화가 무대가 될 때, 뮤지션들은 어떤 음악을 보여줄까? 영화를 무대 삼아 연주하는, 영화음악 감독이 된 뮤지션들의 대표작들을 살펴보자.

 

<어둠 속의 댄서>의 음악감독, 비요크(Björk)

영화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를 연기하고 음악을 맡은 비요크, 출처 – imdb

비요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슬란드 사람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요크의 음악을 단순하게 요약하는 건 불가능할 만큼, 앨범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음악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도 매번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비요크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그를 캐스팅하고 함께 <어둠 속의 댄서>(2000)을 만든다. 비요크는 <어둠 속의 댄서>의 주연과 음악을 맡았고, 제53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비요크의 음악은 같은 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골든 글로브 시상식의 주제가상 후보에도 올랐다.

체코에서 온 이민자 ‘셀마’(비요크)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지만, 외동아들을 위해 미국 워싱턴주의 공장에서 열심히 돈을 모은다. 셀마의 유일한 즐거움은 공장직원들과 <사운드 오브 뮤직> 뮤지컬을 준비하는 거다. 힘든 일도 노래와 춤의 힘으로 견디는 셀마, 그러나 셀마에게 비극이 찾아온다.

<어둠 속의 댄서> 트레일러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가 해피엔딩로 막을 내리지만, <어둠 속의 댄서>는 러닝타임 내내 부지런히 비극을 향해 달리는 뮤지컬 영화다. 셀마의 고단한 현실 뒤에 등장하는 뮤지컬 장면들의 밝은 멜로디는 오히려 현실의 잔혹함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셀마가 아무리 노래와 춤으로 삶을 긍정해도, 세상은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갈 뿐이다. 서사에 있어서 다소 작위적일 수 있는 부분들조차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건, 결국 비요크의 표정과 음악 때문이다. <어둠 속의 댄서>는 비요크로 시작해서 비요크로 완성된 영화다.

 

<킬빌>의 음악감독, 우탱 클랜(Wu-Tang Clan)의 르자(RZA)

왼쪽부터 쿠엔틴 타란티노, 견자단, 르자, 출처 – imdb

르자는 우탱 클랜의 프로듀서이자 랩퍼로, ‘우탱 클랜’은 1990년대 이스트코스트 힙합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다. 특히 중국 무술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룹명 ‘우탱 클랜’은 중국 무협물에 등장하는 ‘무당파’에서 따온 거다. 우탱 클랜의 1집 앨범 <Enter The Wu-Tang (36 Chambers)>은 힙합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는 명반인데, 앨범 제목은 이소룡이 주연한 <용쟁호투>(1973)의 영문 제목 ‘Enter The Dragon’과 유가량 감독의 <소림36방>(1978)의 영문 제목 ‘The 36Th Chamber Of Shaolin’에서 따왔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동양무협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한 영화 <킬빌>(2003) 시리즈를 만들면서 르자를 음악감독으로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킬빌>은 1,2부로 나눠서 각각 2003년과 2004년에 개봉했다. 1부는 일본 사무라이 영화, 2부는 홍콩 무협 영화와 서부극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더 브라이드’(우마 서먼)는 결혼식을 앞두고 의문의 조직으로부터 습격을 당하고, 몇 년 뒤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더 브라이드는 과거를 돌아보며 복수를 꿈꾼다. 그는 조직의 보스 ‘빌’(데이빗 캐러딘)을 비롯한 조직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움직인다.

<킬빌> 트레일러

<킬빌>은 다른 영화의 음악을 가져와서 삽입하고, 관객들에게 익숙한 곡을 예상 못 한 맥락에 사용한다. 다른 작품의 여러 요소를 가져오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걸 완전하게 흡수해서 자신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르자는 우탱 클랜의 작업물에 이어서, <킬빌>의 영화음악을 통해 매력적인 재창조에 성공한다. 최근에는 배우로 더 활발하게 활동 중인 르자이지만, 루머로만 돌고 있는 <킬빌> 3부가 제작된다면 르자가 함께하지 않을까.

 

<엔터 더 보이드>의 음악감독,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토마스 방갈테르(Thomas Bangalter)

다프트 펑크, 출처 – imdb

일렉트로닉 뮤직에 대해 물었을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뮤지션은 다프트 펑크일 거다. 늘 헬멧을 쓰고 있는 프랑스의 듀오 다프트 펑크는 많은 뮤지션과 호흡을 맞췄는데, 범위를 넓혀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트론: 새로운 시작>(2010)에서는 영화음악을 맡았다. 다프트 펑크의 멤버 토마스 방갈테르는 늘 괴작을 만들며 논란의 중심이 되는 가스파 노에 감독과 <돌이킬 수 없는>(2002), <엔터 더 보이드>(2009), 두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마약거래로 먹고 사는 ‘오스카’(나다니엘 브라운)와 스트리퍼로 일하는 동생 ‘린다’(파즈 데 라 후에르타)는 각별한 사이의 남매다. 오스카는 경찰의 단속을 도망치다가 총에 맞고, 과거에 린다에게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떠올린다. 오스카의 영혼은 린다의 곁을 맴돌며 자신과 린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간다.

<엔터 더 보이드> 트레일러

<엔터 더 보이드>는 환각과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 내내 영혼의 입장이 되어서 감상하게 만드는 <엔터 더 보이드>에서, 토마스 방갈테르의 음악은 영화의 설정에 의심 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다프트 펑크의 신나는 음악을 기대하며 <엔터 더 보이드>를 본다면, 어느새 삶과 죽음을 사유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다.

 

<한나>의 음악감독, 케미컬 브라더스(The Chemical Brothers)

케미컬 브라더스, 출처 – imdb

케미컬 브라더스는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듀오로, 앞에서 언급한 다프트 펑크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받는 일레트로닉 뮤지션이다. 시얼샤 로넌이 주연한 <한나>(2011)와 마이클 파스벤더가 주연한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의 음악을 맡기도 했는데, 특히 <한나>의 음악이 돋보인다. 주로 시대극을 연출한 조 라이트 감독의 작품으로, 액션영화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 한 소녀의 성장담에 해당하는 영화다. 케미컬 브라더스는 <한나>로 제37회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한나’(시얼샤 로넌)은 아버지 ‘에릭’(에릭 바나)과 함께 핀란드의 외딴 숲에서 지낸다. 아버지와 함께 훈련하며 자라난 한나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암살기술을 가지고 있다. 한나는 이제 집이 좁게 느껴질 만큼 성장하고, 한나와 에릭은 그들의 과거와 연관 있는 ‘마리사’(케이트 블란쳇)를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

<한나> 트레일러

한나는 숲에서 음악을 책으로만 배우고, 세상에 나온 뒤에 처음으로 음악을 접한다. 적과 싸울 때의 한나는 살인 병기처럼 보이지만, 음악을 듣는 순간의 한나는 세상과 처음 만난 아이다. 한나의 다른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간극을 채워주는 건 케미컬 브라더스의 음악이다. 한나의 감정선을 운반하는 역할에 충실한 음악 덕분에 관객들은 한나의 삶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 한나의 미래를 상상했을 때 그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케미컬 브라더스의 음악을 듣는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