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과 모바일이 융성하면서 출판만화의 입지가 급격하게 좁아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팩트다. 그렇지만 출판만화와 웹툰을 비교해보면, 둘은 기본적인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개성과 매력을 지닌 매체다. 말하자면 사용하는 언어와 운영체계가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이책 시대의 걸작들, 그중에서도 1990년대의 출판만화들이 대부분 절멸된 것은 a매우 아쉽다. 이제는 초희귀 레어템이 되어버린 출판만화의 빛나는 걸작들이 언젠가는 재출간되기를 바라본다. 행여나 중고서점이나 폐업 세일하는 도서대여점에서 눈에 띄면 모셔오자.

 

에노모토 아키라, <세실리아 도어즈>

표지 이미지 구하기도 힘들다, 출처 - 블로그 'Slasir'

웨트웨어(Wetware). 이 단어는 <세실리아 도어즈>의 전반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작품의 배경은 눈을 통해서 감염되는 불치병인 ‘염시병’이 유행하는 근미래다. 가족을 잃고 계부의 학대를 받는 소녀 ‘히비키’는 ‘카이’라는 묘한 소년을 만난다. 카이는 자신이 인간의 몸에 컴퓨터가 이식된 사이보그이며, 하드웨어(Hardware, 육체)와 소프트웨어(Software, 지식)만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웨트웨어를 찾는데 히비키가 동참해줄 것을 제의한다.

<세실리아 도어즈>는 디스토피아 SF의 익숙한 유틸리티에 충실한 작품이다. 살풍경한 미래,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이보그, 불치병 등등. ‘웨트웨어’라는 다분히 시적인 개념도 작가의 오리지널 설정은 아니다. 그러나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상호 소통이 사라진 하드보일드한 미래 풍경은 잊히지 않는 이미지로 남는다.

염시병 때문에 모두 고글을 쓰고 다니고 서로 눈을 마주치는 기초적인 커뮤니케이션조차 상실한 세상, 죽은 동생의 시체를 어떻게 할지 몰라 백팩에 넣고 다니는 히비키의 모습 등은 무섭도록 처연하고 황량하다. 그리고 카이와 히비키의 여정에 따라,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에 물기가 스미듯 퍼지는 온기의 여운은 길다.

 

우에시바 리이치, <가면 속의 수수께끼>

이미지 출처 - 블로그 'Kimo86'

일본만화계의 괴작가 우에시바 리이치의 데뷔작 <가면 속의 수수께끼>는 평범한 여고생 ‘호천’이 같은 반의 ‘송적’이라는 남학생에게 반하고, 둘이 사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호천은 ‘나는 어째서 송적을 좋아하게 된 걸까, 이 아이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사실상 이 만화의 A부터 Z는 호천이 답을  찾아 헤매는 질문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송적이라는 아이가 상식적인 사회에서 말하는 괴짜의 차원을 가볍게 넘어설 만큼 이상하기 때문이다. 호천의 의문은 점점 집요해지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탐구하는 근원적인 영역에까지 다다른다. 학원물에서 시작한 만화는 어느새 이계부터 우주 저편까지 넘나든다. 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가 누구나 안고 있지만, 잊어버리거나 가볍게 넘기는 삶의 의미와 비밀을 찾는 여행이 된다.

강박적일 만큼 치밀한 그림에서 작가의 정신상태가 드러나는 듯 하다, 이미지 출처 'Filon'

<가면 속의 수수께끼>는 기본적으로 학원 연애물이다. 그러나 단순한 연애물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쉬운 만화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친절함과는 담을 쌓았고, 작가가 그리다가 약을 좀 털어 넣었는지 의심스러운 변태적인 아스트랄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글자 수, 복잡다단한 신화적 상징을 견뎌낼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있다면, 이처럼 대단히 독창적인 깨달음과 인문학적 재미를 주는 만화도 드물다. 정밀하기 그지없는 작화 역시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다.

 

이츠키 나츠미, <오즈>

이미지 출처 'Amazon'

3차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초토화된 근미래에는 전쟁과 기아가 없는 과학도시 ‘오즈’의 전설이 떠돌고 있다. 16세의 천재 과학자 필리시아는 오즈의 리더인 오빠를 만나러 안드로이드 ‘1019’와 용병 무토 중사의 보호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오즈는 그들이 꿈꾸던 이상향이 아닌 광기의 지옥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츠키 나츠미의 <오즈>는 독특한 위치에 자리 잡은 만화다. 1990년대의 카테고리에서는 순정만화에 해당하는데, 테마는 <블레이드 러너>의 영향 아래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 거기에 재미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의 매력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마니아들은 많다. 거칠면서도 단정한 그림체, 질질 끌지 않고 직선으로 돌진하는 스토리, 캐릭터의 명확한 성격 등 상업 만화로서의 성공 요소가 4권 안에 군더더기 없이 압축되어 있다.

이 만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그 장면, 보리밭, 이미지 출처 'Filon

앞서 말했듯 이 만화는 당시  기준으로 ‘순정만화’로 분류된다. 그 점을 감안하면, 유니섹스와 BL 코드, 잘생겼지만 적당히 닳아빠지고 시니컬한 무토의 ‘세속적인 어른’ 캐릭터가 여성 독자들에게 가져온 반향은 컸다. 그 시절의 만화 번역서로서는 파격적인 판형과 디자인, 컬러까지 여러 모로 소장각이다.

 

Writer

최승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