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말괄량이 삐삐’가 관용구처럼 쓰이기 시작한 건. 원작을 접한 적 없는 세대조차 친숙하게 느낄 만큼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으며 영화, 드라마, 일러스트로 다양하게 재탄생한 삐삐 롱스타킹. 그중에서도 1940년대에 탄생한 오리지널 일러스트를 빼고서 삐삐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초의 삐삐이자 ‘가장 삐삐다운 삐삐’로 기억되는 덴마크 일러스트레이터 잉리드 방 니만(Ingrid Vang Nyman)의 그림 말이다.

삐삐에게 말괄량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사연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당시의 스웨덴 사회는 ‘어린이란 자고로 단정하고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통념이 만연하던 곳. 하지만 삐삐는 마을에 이사 온 첫날부터 그 생각을 와르르 무너뜨린다. 알록달록한 옷에 아빠 구두를 훔쳐 신은 듯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가족이라고는 보살펴 줄 부모도 없이 조그만 원숭이뿐이고 학교에는 찾아갈 생각도 않는 것이다. 기겁한 어른들이 예의범절을 가르치겠다며 삐삐의 집을 찾아가지만, 입담은 얼마나 좋고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이쯤 되니 어른들의 눈에 삐삐가 고깝게 보일 리 없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안다. 삐삐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버릇없는 골칫덩이가 아니라는 걸, 조금 자유분방할지는 몰라도 다듬지 않은 원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라는 걸.

삐삐는 구구단을 외우거나 글씨를 제대로 쓰는 법은 모르지만, 좋은 것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안다.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에 머무르는 대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도 안다. 어쩌면 삶의 진실에 대해 어른들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삐삐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결을 지닌 채 활자로만 존재하던 삐삐는 마침내 잉리드 방 니만을 만나 형체를 입는다. 쭉 찢어진 눈에 조그만 들창코, 어딘가 뾰로통해 보이는 표정까지. 처음엔 어디 심술이라도 났나 싶지만 보면 볼수록 오밀조밀하니 점점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고, 탁구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를 삐삐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것도 같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동양적인 분위기도 느껴지는데, 이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니만의 시그니처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유럽 바깥의 문화권에 잔뜩 매료되어 있었던 그는 <Children in East and West>라는 테마로 꽤 많은 양의 사설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자신의 이누이트 혼혈인 사촌이 집필한 <에스키모 소년>에서 일러스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머리에 히잡을 두르거나 기모노를 입고 빙하 위에 앉아있는 꼬마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자꾸만 빨간 갈래머리를 하고 양 볼에 주근깨가 별자리처럼 박힌 스웨덴 꼬마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 같아서.

이처럼 니만의 그림에선 전반적으로 다른 문화권에 대한 관심이 고스란히 묻어나지만, 흥미로운 건 정작 그의 삶에는 여행이라고 부를만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것. 덴마크 출신이지만 주로 스웨덴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가장 비슷하다면 비슷한 내용일까. 어쩌면 니만은 자신이 동경하던 세계를 어느 정도 미지의 세계로 남겨두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 됐든, 때로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너무 완벽하게 아는 것보단 그렇지 못한 편이 더 나을 때도 있으니 말이다.

어릴 적엔 커다란 말 한 마리를 들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닐 만큼 힘이 세고, 집안에는 금화가 궤짝으로 쌓여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하는 어른도 없어 동경했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짤막하지만 철학적인 대사를 자꾸만 곱씹게 되는 삐삐 롱스타킹. 그런 만큼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 왔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삐삐를 그린 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 어디선가 이 뾰로통하고 사랑스러운 꼬마들을 마주친다면, 그때는 잉리드 방 니만이라는 이름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먼 이국에서 날아온 이 이름을 다시 한번 발음해본다. 

 

Writer

언어를 뛰어넘어, 이야기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마음속에 새로운 씨앗을 심어주고,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가 되어주니까. 그래서 그림책에서부터 민담, 괴담, 문학, 영화까지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중. 앞으로 직접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며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나가기를 꿈꾸고 있다.
전하영 블로그 
전하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