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은 독특한 공간이다. 일상에서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광활한 바다를 두 발 붙이고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다 앞에 선 우리는 평소 감춰두었던 솔직한 감정들을 마주하거나 어두운 감정들을 털어놓게 된다. 마치 바다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휴가철 사람들이 붐비는 해수욕장을 피해 홀로 조용한 해변을 찾는 이들이 있는 것은 그 까닭이다.

 

상실의 바다, <하나레이 베이>(2019)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 ‘사치’(요시다 요). 그가 꿈을 접고 투신한 결혼은, 마약을 일삼다가 다른 여자 품에서 죽은 남편으로 인해 엉망이 됐다. 게다가 남겨진 19살 외동아들마저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으로 서핑을 떠났다가 상어에게 물려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치는 이 거대한 상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치는 10년 동안 매해 같은 날, 하나레이 해변을 찾아 홀로 조용한 휴가를 보낸다. 그가 하는 일은 오로지 푸른 바다를 앞에 두고 해변을 서성이거나 책을 읽는 것뿐. 사치는 아들에 대한 기억 중 마음에 들지 않았던 면모들을 끄집어내며, 자신이 단지 ‘어머니’로서의 의무감에 바다를 찾았을 뿐이라 스스로 되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외다리 일본인 서퍼를 보았느냐고 묻는 소년들을 만나며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게 된다.

자식을 앗아간 바다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2006)에 실린 다섯 기담 중 하나. 영화는 작가인 하루키에게도, 하루키의 독자인 우리에게도 무척 익숙한 키워드인 ‘상실’과 그에 대처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대자연의 영상미와 함께 아우른다. 새하얀 모래사장과 이를 덮는 새파란 바다, 그리고 녹음이 짙은 숲. 그 속에서 사치는 비로소 자신의 슬픔에 솔직해지고, 점차 치유되기 시작한다.

 

외로움의 바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내 삶을 재현하거나 선언하는, 자전적인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왜곡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내 작업 방식은 내 안의 개인적인 디테일을 모아서, 그걸 자유롭게 배열하는 것이다. 나와 가까운 디테일을 가져오는 이유는 나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무게감을 주기 때문이다.” – 홍상수

홍상수 감독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면 작품과 작품 밖 현실이 자꾸 겹쳐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배우 ‘영희’(김민희)가 유부남 영화감독과의 불륜이 대중에 공개된 이후 피폐해진 내면을 치유하고, 서운하고 괴로웠던 감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토로하는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무수히 많은 대화는 마치 관객이 상상하는 감독과 배우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할 만한 대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가십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월트 휘트먼의 시에서 가져온 영화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서 있는 영희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질 따름이다. 여러 사람들 틈 속에 있으면서도,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영희의 심정은 결국 영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잔뜩 쏟아내고 싶었던 모든 말을 담아둔 채 홀로 해변에서 깨어나야 하는 고독감, 영화 안팎으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과 많은 언어들을 감수하고 뚜벅뚜벅 해변을 걸어가야 하는 그의 사랑에 대한 의지를 통해서 말이다.

 

실연의 바다, <체실 비치에서>(2017)

이 영화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부부가 신혼 여행지인 ‘체실 비치’에 도착해 첫날 6시간 만에 이별하게 되는 파격적인 스토리를 다룬다.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과 처절한 비극이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연이어지는 극적 아이러니와 사건의 배경이 되는 체실 비치의 아름답지만 창백한 시각적 아이러니를 통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1960년대 초, 런던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한 대학원생 ‘에드워드’(빌리 하울 분)와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 ‘플로렌스’(시얼샤 로넌 분)는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고 체실 비치의 외딴 호텔로 신혼여행을 온다. 그러나 성적 금기가 만연했던 당시 보수적인 사회에서, 그때까지 순결을 지켜왔던 두 남녀는 각자 안고 있던 성에 대한 고민을 이제서야 서로 마주하고 결국 첫날 밤 잠자리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잠자리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한 문제 대처마저 서툴렀던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별을 선택하게 된다.

<체실 비치에서> 속 해변은, 평생 동안 사랑을 약속했던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이해의 벽을 넘지 못한 채 관계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좌절의 공간이다. 관객은 짧은 시간 안에 에드워드와 플로렌스의 미래를 접하기 때문에, 실연의 배경이 되는 이 시공간이, 두 사람의 선택이 더욱더 안타깝기만 하다. 사실 한순간의 짧은 불가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중한 관계를 눈앞에서 놓치는 주인공들의 불행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마주하는 장면들이다. 원작 작가는 맨부커 수상자이자 골든글로프 작품상을 받은 <어톤먼트>의 원작자 이언 매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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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실패하고도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 나를 어리석게 하는 모든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것들의 총체가 곧 나임을 믿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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