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손석희 앵커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부모가 그를 너무 좋아하여 딸 이름을 ‘테일러’로 지었다는 일화도 함께 소개되었다. 그 딸은 정상의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하여 이제까지 5천만 장의 음반을 판매하였고, 벌써 10회의 그래미 수상자가 되었다. 2011년에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 자신의 우상 제임스 테일러를 초대하여 그의 대표곡 ‘Fire and Rain’을 함께 불러 화제가 되었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제임스 테일러의 ‘Fire and Rain’(2011)

많은 사람이 ‘싱어송라이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으로 ‘제임스 테일러’를 꼽는다. 1948년생이니까 이제 70대 초반인 그는, 1960년대 후반 통기타를 연주하고 조곤조곤 대화하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포크 음악계에 데뷔했다. 당시 격변기를 지나 온 미국의 대중은 아픔을 치유하는 음악을 찾을 때였다. 마침 그에게는 스토리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고, 데뷔할 무렵에는 모터사이클 사고로 두 팔과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마약 과용과 친구의 자살이라는 개인적인 슬픔도 있었다. 이런 다양한 아픔을 모두 담은 ‘Fire and Rain’은 당시 대중을 깊이 감동시켰고, 이를 수록한 <Sweet Baby James>(1970)는 300만 장을 판매하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Fire and Rain’은 자신의 아픔을 노래한 곡으로, 노래 속의 ‘Suzanne’은 자살한 여자친구를 가리킨다

뉴욕에서 데뷔할 무렵, 집 근처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버스킹을 했던 그는 소설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에 비교되거나 카우보이 예수(Cowboy Jesus)로 불리는 페르소나를 형성했다. 당시 인기 싱어송라이터이자 대형 출판사 사이먼 & 슈스터(Simon & Shuster)의 창업자 딸인 칼리 사이먼(Carly Simon)과 결혼하며 스타 커플로도 화제를 모았다.

‘You’ve Got a Friend’(1972)로 제임스 테일러는 그래미 남자 팝보컬상을, 작곡자 캐롤 킹은 ‘Song of the Year’를 수상했다

결혼과 함께 잠시 음악적인 침체기에 접어들기도 했지만, 컬럼비아 레코드로 이적 후 첫 앨범이자 자신의 여덟 번째 앨범 <JT>(1977)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 수록한 ‘Handy Man’은 또다시 그래미 팝보컬상을 수상했고, 음반은 미국에서만 350만 장이 팔렸다. 하지만 뉴욕 데뷔 시절에 시작한 마약은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고, 완전한 헤로인 중독으로 이어졌다. 수시로 요양기관에서 치료를 받으며 마약을 끊기 위해 애썼으나 허사였다. 결국 스타 커플은 11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처음으로 빌보드 1위에 오른 최고 히트곡 ‘Handy Man’

두 번째 부인 캐스린 워커(Kathryn Walker)의 노력으로 그는 마약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인생의 중반에 접어든 그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돌아온 앨범 <Hourglass>(1997)으로 그래미 팝앨범상을 받았고, 이어 <October Road>(2000)가 평론가들의 호평과 함께 플래티넘에 올라섰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열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Before This World>(2015)는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변함없는 대중적 인기를 확인하였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제임스 테일러 브릿지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그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지역의 새로 확장한 다리를 그에게 헌정하여 ‘James Taylor Bridge’ 라고 부른다. 제임스 테일러의 음악은 그 자신의 인생 역정과 오랜 추억을 담고 있는데, 이런 그의 ‘Carolina in My Mind’가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잡은 데 대한 주정부의 감사의표시였다. 열렬한 민주당원으로 정치적인 입장 표명에도 활발하고 많은 자선 활동에서 빠지지 않는 그는 아마 앞으로도 미국인들의 감정을 대변하고 가장 존경받는 싱어송라이터일 것이다.

데뷔앨범 <James Taylor>(1968)에 수록한 'Carolina in My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