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 아트디렉터를 거쳐 일러스트레이터, 소설가, 만화가로 활동하던 안자이 미즈마루는 한 신인 작가의 단편소설에 들어갈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의뢰받는다. 6살의 나이 차를 가진 두 작가의 인연은 그 후 30년간 지속해서 이어진다.
오랫동안 신인 작가는 글을 쓰고, 미즈마루는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이름을 알기 전부터 둘은 때론 친구로, 예술의 동반자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몇 개의 선으로 대충 쓱쓱 그린 것 같은 미즈마루의 그림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그렇게 서로를 완성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즈마루와의 만남을 마치 “운명 같았다”고 회상한다.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와 주로 작업을 해오던 하루키는 우연히 미즈마루의 그림을 발견한 후 그를 편집자에게 추천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실제로 둘은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부터 관심사, 인생의 태도, 끝내주는 주량까지 닮은 구석이 제법 많았다.
하루키의 얼굴
미즈마루의 작업을 쭉 살펴보면 그가 유독 하루키의 얼굴을 많이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짧은 머리와 밤처럼 동그란 두상,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일자 눈썹으로 표현한 단순한 초상화는 오히려 그가 하루키란 사람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화려하지 않아도 깊게 이해하고 오래 관찰해야만 그릴 수 있는 그림, 미즈마루는 주로 그런 그림을 그렸다.
“가끔 길에서 독자가 말을 걸 때가 있다.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아봤어요?”하고 신기해하며 물으면, “무라카미 씨 얼굴은 미즈마루 씨 그림으로 늘 보고 있으니까요. 쿡쿡.”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으음, 그렇게 닮았나.” –무라카미 하루키, 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中-



하루키의 초상화와 다수의 작업에서 느껴지듯, 미즈마루는 애써 열심히 그린 그림이 아닌 대충 그린 그림을 지향한다. 그에게 ‘대충’이란 나태하고 무성의한 게으름이 아니라 일종의 ‘힘을 뺀 상태’를 의미한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느낌을 단시간에 순발력 있게 그리는 그림. 너무 힘주지 않으며 그 순간에 온전히 몰두한 미즈마루의 그림은 ‘그리는 행위’의 본질에 우리를 한발 다가서게 한다.


“미즈마루 씨는 내 속에 잠재한 ‘세상에 도움은 전혀 안 되지만 이따금 저쪽에서 멋대로 불어오는, 그다지 지적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종류의 별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컬러풀하게 이해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입니다. 나한테는 소울브라더 같은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中-

잘 그린 그림
‘잘 그린 그림’이란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누군가는 대상을 정확히 재현한 그림을, 또는 감정을 격렬히 분출한 그림을 향해 잘 그린 그림이라 이름표를 붙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잘 그린 그림이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담백하게 존재를 표현해내는, 그 누구도 아닌 ‘안자이 미즈마루’만이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은 하루키의 문장과 함께 독특한 시너지를 뿜어낸다. 문장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여백을 단단히 채워간다.

2014년 3월 타계할 때까지 미즈마루는 1년에 오직 3일만 쉴 정도로 지치지 않고 작업에 매진했다. 정신없이 바빠도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진정 행복했다는 그의 삶의 태도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 결국 어떤 것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단순한 해답을 제시한다. 군더더기도, 거창한 목표도 없이 그저 꾸준히, 매일매일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 청량한 바람 속 여름의 기운이 스쳐 가는 이 봄날, 하루키의 문장을 읽기 전에 그의 그림을 먼저 유심히 들여다봐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