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 아트디렉터를 거쳐 일러스트레이터, 소설가, 만화가로 활동하던 안자이 미즈마루는 한 신인 작가의 단편소설에 들어갈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의뢰받는다. 6살의 나이 차를 가진 두 작가의 인연은 그 후 30년간 지속해서 이어진다.

오랫동안 신인 작가는 글을 쓰고, 미즈마루는 그림을 그렸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이름을 알기 전부터 둘은 때론 친구로, 예술의 동반자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몇 개의 선으로 대충 쓱쓱 그린 것 같은 미즈마루의 그림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그렇게 서로를 완성했다.

미즈마루가 그린 자신(왼쪽)과 무라카미 하루키(오른쪽), 사진출처 'herenow'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즈마루와의 만남을 마치 “운명 같았다”고 회상한다. 다른 일러스트레이터와 주로 작업을 해오던 하루키는 우연히 미즈마루의 그림을 발견한 후 그를 편집자에게 추천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실제로 둘은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부터 관심사, 인생의 태도, 끝내주는 주량까지 닮은 구석이 제법 많았다.

 

하루키의 얼굴

미즈마루의 작업을 쭉 살펴보면 그가 유독 하루키의 얼굴을 많이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짧은 머리와 밤처럼 동그란 두상,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일자 눈썹으로 표현한 단순한 초상화는 오히려 그가 하루키란 사람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화려하지 않아도 깊게 이해하고 오래 관찰해야만 그릴 수 있는 그림, 미즈마루는 주로 그런 그림을 그렸다.

“가끔 길에서 독자가 말을 걸 때가 있다.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아봤어요?”하고 신기해하며 물으면, “무라카미 씨 얼굴은 미즈마루 씨 그림으로 늘 보고 있으니까요. 쿡쿡.”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으음, 그렇게 닮았나.” –무라카미 하루키, 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中-

미즈마루가 그린 무라카미 하루키 ⓒAnzai Mizumaru
잡지 <BRUTUS> 표지(1995년 5월호). 달리기하는 하루키의 모습을 그렸다, 사진출처 'ununliving'
<꿈의 서프시티> 표지 그림 ⓒAnzai Mizumaru

하루키의 초상화와 다수의 작업에서 느껴지듯, 미즈마루는 애써 열심히 그린 그림이 아닌 대충 그린 그림을 지향한다. 그에게 ‘대충’이란 나태하고 무성의한 게으름이 아니라 일종의 ‘힘을 뺀 상태’를 의미한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느낌을 단시간에 순발력 있게 그리는 그림. 너무 힘주지 않으며 그 순간에 온전히 몰두한 미즈마루의 그림은 ‘그리는 행위’의 본질에 우리를 한발 다가서게 한다.

책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속 일러스트레이션, 사진출처 'herenow'
하루키와 미즈마루가 함께 작업한 동화책 <후와후와>. 폭신폭신한 고양이의 느낌을 한껏 살렸다, 사진출처 'herenow'

“미즈마루 씨는 내 속에 잠재한 ‘세상에 도움은 전혀 안 되지만 이따금 저쪽에서 멋대로 불어오는, 그다지 지적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종류의 별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컬러풀하게 이해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입니다. 나한테는 소울브라더 같은 사람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中-

책 <맛>의 표지원화, 사진출처 'rcc.recruit'

 

잘 그린 그림

‘잘 그린 그림’이란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누군가는 대상을 정확히 재현한 그림을, 또는 감정을 격렬히 분출한 그림을 향해 잘 그린 그림이라 이름표를 붙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잘 그린 그림이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담백하게 존재를 표현해내는, 그 누구도 아닌 ‘안자이 미즈마루’만이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은 하루키의 문장과 함께 독특한 시너지를 뿜어낸다. 문장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여백을 단단히 채워간다.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 사진출처 '101art'

2014년 3월 타계할 때까지 미즈마루는 1년에 오직 3일만 쉴 정도로 지치지 않고 작업에 매진했다. 정신없이 바빠도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진정 행복했다는 그의 삶의 태도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 결국 어떤 것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단순한 해답을 제시한다. 군더더기도, 거창한 목표도 없이 그저 꾸준히, 매일매일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 청량한 바람 속 여름의 기운이 스쳐 가는 이 봄날, 하루키의 문장을 읽기 전에 그의 그림을 먼저 유심히 들여다봐야 할 이유다.

 

Writer

유지우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