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을 떠올리면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과장된 몸짓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순간에는 늘 음악이 함께 한다. 그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상황에 맞는 탁월한 음악 덕분이다. 찰리 채플린이 연출하고 연기한 작품 중 상당수는 그가 직접 음악을 담당했다. 심지어 찰리 채플린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찰리 채플린뿐만 아니라 호러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 유니크한 감성을 지닌 스페인 출신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배우 겸 감독으로서 꾸준히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받아 온 클린트 이스트우드까지 자기 작품의 음악과 연출을 겸하는 감독들이 있다. 영화와 음악은 늘 맞닿아 있다. 영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음악을 직접 담당할 수 있다는 건, 자신의 영화 세계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큰 이점일 거다. 자신이 연출한 영화 속 음악을 직접 담당하는 감독들의 대표작을 살펴보자.

 

<라임라이트>의 음악을 담당한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은 무성영화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를 빼놓고 무성영화를 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유성영화가 익숙한 현시대의 관객들에게 영화음악은 인물들의 대사 뒤로 흐르는 배경음에 가깝지만, 무성영화 속 음악은 영화 속 유일한 소리인 만큼 그 중요성이 크다. 찰리 채플린은 <황금광시대>(1925), <시티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등의 작품에서 직접 음악을 맡았다. 그가 직접 음악을 맡은 작품 중에서 1952년에 연출한 <라임라이트>는 1973년에 개봉해서, 제4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라임라이트>는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작품이다. 과거에 유명 코미디언이었던 '칼베로'(찰리 채플린)는 사람들에게 잊힌 채 알코올 중독자로 산다. 그는 우연히 같은 건물에 사는 '테리'(클레어 블룸)가 자살 시도 하는 걸 발견하고 그녀를 간호한다. 테리는 한때 무용수였지만 지금은 심리적인 이유도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칼베로가 용기를 준 덕분에 테리는 발레리나로 다시 주목 받지만, 칼베로에게 과거의 영광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라임라이트> 테마곡)

찰리 채플린은 무성영화를 주로 만들어왔지만, <라임라이트>는 찰리 채플린이 만든 유성영화다. 장면 장면마다 그의 삶과 가치관이 묻어나는 작품으로, 대중에게 잊힌 코미디언 칼베로는 유성영화의 등장과 함께 설 자리를 잃어가는 찰리 채플린 자신처럼 보인다. 영원히 자신을 비출 것 같던 라임라이트(스포트라이트)는 이제 자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을 비춘다.

<라임라이트> 트레일러 

<라임라이트>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있다. 찰리 채플린은 무성영화 시대에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버스터 키튼을 캐스팅하고, 그와 함께 슬랩스틱 공연을 펼친다. 무성영화의 아이콘인 두 사람이 공연 후 퇴장한다. 둘이 퇴장한 뒤 테리의 무대가 시작된다. 찰리 채플린은 칼베로의 입을 통해 좀 더 많은 대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도, 연출자로서 테리의 무대가 돋보이도록 음악을 깔아준다. 후배에게 라임라이트를 비춰주고 퇴장하는 감독 찰리 채플린, 이보다 품격 있는 퇴장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거다.

 

<할로윈>의 음악을 담당한 영화감독, 존 카펜터

이 글을 통해 소개할 감독 중에 음악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존 카펜터일 거다. 존 카펜터는 <슬레이어>(1998)로 제24회 새턴어워즈에서 최우수 음악상을 받았고, 자신이 연출한 작품 대부분의 음악을 직접 맡았다. 그가 음악을 맡은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할로윈>(1978)으로, <할로윈>의 테마곡은 지금까지도 국내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할 만큼 압도적인 분위기를 가진 곡이다. (<할로윈> 테마곡)

6살 때 누나와 누나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마이클 마이어스'(닉 캐슬)는 정신병원에 보내진다. 15년 후 마이클 마이어스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다. 할로윈데이에 고향에 돌아온 마이클 마이어스는 자신의 집 근처에 갔다가 우연히 '로리 스트로드'(제이미 리 커티스)를 본다. 마이클 마이어스는 가면을 쓰고 로리 스트로드의 의 뒤를 쫓는다.

<할로윈> 트레일러 

<할로윈>은 제작비의 100배 이상을 벌어들인 호러영화의 걸작으로, 성공의 여러 이유 중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여러 장르 중에서도 호러는 청각이 중요한 장르다. 존 카펜터가 호러영화의 거장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극의 분위기를 잡아줄 양질의 음악을 직접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작년에 개봉한 <할로윈>(2018)은 동명의 원작을 리부트한 작품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존 카펜터의 음악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강렬하다.

 

<디 아더스>의 음악을 담당한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스페인 출신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서 연출과 음악을 겸했다. 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서 남에게 음악을 맡기면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할 것 같아서 직접 음악을 만든다고 밝힌 바 있다. 장편 데뷔작 <떼시스>(1996), 톰 크루즈가 주연한 <바닐라 스카이>(2001)의 원작인 <오픈 유어 아이즈>(1997),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은 <씨 인사이드>(2004) 등의 작품에서 음악과 연출을 겸했다. 그가 음악을 맡은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니콜 키드먼과 호흡을 맞춘 호러영화 <디 아더스>다. (<디 아더스> 테마곡)

1945년 영국의 한 저택, 2차 대전에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빛 알레르기가 있는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하루아침에 집안일을 하던 모든 하인이 사라지고, 때마침 새로운 세 명의 하인이 그레이스를 찾아온다. 그레이스는 하인들에게 커튼을 항상 치고, 문은 항상 잠가두라고, 두 아이를 위한 규칙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그레이스의 주변에 점점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디 아더스> 트레일러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연출했고, 서로 다른 장르임에도 그가 맡은 음악은 작품에 딱 맞게 느껴진다. <디 아더스>는 반전영화로 잘 알려진 작품으로, 반전이 인상적이라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강약조절이 잘 된 작품이란 뜻이다. <디 아더스>의 완급조절에 있어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음악은 큰 역할을 한다. <디 아더스>는 보고 나면 플루트와 첼로 소리가 맴도는 영화로, 극의 비밀을 끝까지 안고 가는 데 있어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음악을 담당한 영화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배우 겸 감독을 소화한 이들은 많지만 두 가지 모두 호평받은 이는 흔치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두 가지를 모두 성공적으로 소화한 영화인이다. 게다가 그는 <미스틱 리버>(2003), <아버지의 깃발>(2006), <체인질링>(2008) 등의 작품에서 직접 음악을 맡았다. 그는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가질 만큼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음악이란 음악이 도드라지기보다 영화에 잘 녹아 드는 거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는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영화음악의 예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권투매니저이자 컷맨(시합 때 권투 선수의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 출신 F.X 톨의 단편집 ‘불타는 로프(Rope Burn)’가 원작이다. 컷맨 출신 관장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복서 출신 '스크랩'(모건 프리먼)과 함께 허름한 복싱체육관을 운영 중이다. 프랭키는 자신에게 트레이너가 되어 달라면서 체육관에 찾아온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여자 선수의 트레이너는 하지 않는다며 무시한다. 그러나 매일 같이 찾아와 훈련하는 매기의 절실함과 스크랩의 권유로 프랭키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테마곡)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제7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쓴 작품이다. 이외에도 다른 시상식의 많은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는데, 특히 제6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음악상 후보에 오른 게 인상적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트레일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관객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황야의 무법자>(1964) 등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이나 형사물인 <더티 해리>(1971)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로 기억하는 관객도, 배우보다 감독으로 더 친숙한 관객도 있을 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다양한 모습 중에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 속 그는 사려 깊은 어른으로 보인다. 배우, 연출자, 음악감독, 그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 관객으로서 앞으로도 그의 따뜻함이 담긴 작품으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