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스틸컷

영화 <위플래쉬>(2014)의 그 배우를 기억하는가. 드럼을 기가 막히게 잘 치던, 얼굴은 평범한데 연기 한번 독하게 잘하던 그 배우.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위플래쉬>의 주인공이라는 게 이름보다 더 이름 같을 뿐. 배우의 이름은 다름 아닌 마일즈 텔러다. 대표작이 <위플래쉬> 하나인 것도 아니요, <위플래쉬>에서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연기를 잘한 것 또한 아니다. 이렇다 보니 마일즈 텔러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이름보다 유명한 배역을 갖는다는 건 과연 배우에게 좋은 일일까. 다른 영화에서 아무리 빛나는 연기를 해도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게 되니 말이다.

마일즈 텔러 AP Images/Invision

여기 <위플래쉬>의 그 배우, 마일즈 텔러가 연기한 네 편의 영화가 있다. 당신이 기대하던 <위플래쉬>의 드럼 잘 치던 아이는 어디에도 없다. 고등학생이기도 했다가, 복서이기도 했다가, 군인이기도 한 그를 보다 보면 <위플래쉬>로만 알고 있었다는 게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마일즈 텔러라는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래빗홀>

영화 <래빗홀(Rabbit hole)>은 마일즈 텔러의 데뷔작이다. 하지만 데뷔작치고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일단 원작부터가 퓰리처상을 받은 동명의 희곡. 감독은 <헤드윅>(2000)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 게다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은 물론 제작까지 맡았다. 거기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다이안 위스트와 <다크나이트>(2008)의 아론 에크하트까지 출연한다. 이런 영화에 캐스팅되다니. 대학 졸업을 앞둔 스물세 살의 배우 지망생으로서는 이만한 행운이 또 없을 정도다. 하지만 존 카메론 미첼 감독과 니콜 키드먼은 입을 모아 마일즈 텔러를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니콜 키드먼은 <래빗홀> 이후 마일즈 텔러의 열혈 팬을 자처하며 여기저기서 그의 연기를 극찬하고 다녔단다.

<래빗홀> 스틸컷

한 가지 확실한 건 진짜 행운을 얻은 사람은 <래빗홀>이라는 영화를 보게 된 관객이라는 거다. 감히 말하건대 ‘상실’을 다룬 영화 중에 <래빗홀>만큼 내밀하고 정교한 영화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베카’(니콜 키드먼)와 ‘하위’(아론 에크하트)의 아픔이 너무도 생생해서 간접 체험을 넘어 직접 체험을 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베카가 “이 슬픔이 사라지기는 하나요?”라고 베카의 엄마(다이안 위스트)에게 물을 때나, ‘제이슨’(마일즈 텔러)에게 “이건 슬픈 버전의 나”라고 말할 때의 그 대사들은 끝내 마음 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영영 사라지지 않을 저 깊은 곳에.

<래빗홀> 예고편

 

<스펙타큘라 나우>

배경은 고등학교. 술과 파티를 즐기는 바람둥이 남자와 순수하고 평범한 여자. 전애인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새로운 여자를 만나기 시작한 남자. 하지만 점점 여자의 매력에 빠져든다. <스펙타큘라 나우(The Spectacular Now)>의 줄거리다. 흔한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의 줄거리 같아 보인다. 그래서 보기도 전에 어차피 똑같은 내용일 것이라고 치부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도 하이틴 영화도 아닌 성장 영화. 영화 각본은 무려 <500일의 썸머>(2009)로 유명한 마이클 웨버(Michael Weber)가 썼다. 뻔한 영화라며 지나쳐버리기엔 아까운 영화다.

<스펙타큘라 나우> 스틸컷

심지어 주인공인 ‘셔터’(마일즈 텔러)는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서 용서가 안 되는 수준이다.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데다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것까진 좋은데 미래에 대한 어떤 대책도 희망도 없다. 순수하고 착한 ‘에이미’(쉐일린 우들리)는 또 어떤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되기엔 수동적이고 답답하다. 하지만 다행히 이 영화는 성장 영화. 영화는 둘의 알콩달콩한 연애보다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도 셔터나 에이미처럼 어떤 면에서는 용서가 안 될 정도로 구제 불능이지만, 어쨌든 조금씩 성장해나가니까. 평론가 故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생전 마지막 평론에서 <스펙타큘라 나우>에 대해 “우리는 셔터와 에이미와 함께 3학년을 보냈다. 우리는 그들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들이다.”라고 썼는데 이보다 이 영화를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스펙타큘라 나우> 출연 배우와 감독, 왼쪽부터 브리 라슨, 마일즈 텔러, 쉐일린 우들리, 감독 제임스 폰솔트, 출처 – Zimbio

사실 셔터가, 에이미가 우리 자신처럼 느껴지는 건 순전히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다. 그 공은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인정받아 마일즈 텔러와 쉐일린 우들리는 공동으로 심사위원 특별상 연기상을 받기까지 했다. 이 영화 이전까지만 해도 이렇다할 대표작이 없던 마일즈 텔러나 쉐일린 우들리에게 <스펙타큘라 나우>라는 대표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쉐일린 우들리는 특히 이 영화 이후 <다이버전트>(2014)의 주인공을 꿰차면서 헐리우드 차세대 대표 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스펙타큘라 나우>에서 마일즈 텔러의 전애인 역할을 맡았던 브리 라슨 또한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몇년 후 자신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펙타큘라 나우> 예고편

 

<블리드 포 디스>

2007년, 마일즈 텔러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시속 80마일로 달리던 자동차가 중심을 잃고 8바퀴를 구르면서 마일즈 텔러는 창문 밖으로 튕겨 나갔고, 그는 차에서 30피트 떨어진 곳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고로 그는 얼굴에 여러 개의 흉터를 갖게 되었다. 처음 연기 학교에 갔을 때만 해도 만약 키우던 개가 죽는다면 그것이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가장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일 것이라고 이야기하던 마일즈 텔러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련이었다.

<블리드 포 디스> 스틸컷

지금 마일즈 텔러의 사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블리드 포 디스(Bleed for This)>의 비니 파지엔자를 말하기 위해서다. 199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복서 비니 파지엔자는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인생 최고의 순간, 교통사고로 목뼈가 부러진다. 두개골에 나사를 박아 목뼈를 고정하는 ‘헤일로’라는 기구를 착용하고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던 비니 파지엔자는 사고 후 13개월 만에 다시 챔피언 자리에 오르면서 걷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라던 의사의 진단을 무색하게 만든다. 영화 <블리드 포 디스>는 바로 이러한 비니 파지엔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렇다 보니 마일즈 텔러가 비니 파지엔자 역할을 맡은 건 어떤 운명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블리드 포 디스> 스틸컷

마일즈 텔러 또한 그런 운명의 무게를 느낀 듯하다. 그는 비니 파지엔자의 이야기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19%였던 체지방을 6%로 감량하는가 하면 8개월 동안 혹독한 트레이닝을 감수하기도 하며 엄청난 책임감을 발휘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 영화에서 근육질의 몸과는 거리가 있던 이전의 마일즈 텔러와는 전혀 다른 마일즈 텔러를 만나볼 수 있다.

<블리드 포 디스> 스틸컷

그뿐 아니라 비니 파시엔자를 변화시키는 코치 ‘케빈 루니’ 역할을 맡은 아론 에크하트의 변신도 인상깊다. 대부분 관객은 끝날 때까지 영화 속에서 아론 에크하트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자책할 건 없다. 아론 에크하트와 함께 작업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조차도 벤 영거 감독이 처음 이 영화를 보여주었을 때 영화 시작 후 10분 동안 코치 케빈 루니가 아론 에크하트인지 못 알아 봤다고 하니 말이다.

<블리드 포 디스> 예고편

 

<땡큐 포 유어 서비스>

이번엔 군인이다. 데뷔작에서만 해도 앳된 고등학생을 연기했던 마일즈 텔러는 정확히 8년 후 영화 <땡큐 포 유어 서비스(Thank you for your service)>로 아이가 둘이나 있는 참전 용사를 연기한다. 그동안 그의 연기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를 보면 앞서 보았던 고등학생이나 드러머, 복서는 온데간데없고, 각이 잡힌 군인이 한 명 등장한다. 말투도 행동도 영락없는 군인의 모습이다. 도대체 마일즈 텔러의 변신은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땡큐 포 유어 서비스> 스틸컷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의 각본을 맡았던 제이슨 홀(Jason Hall)이 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 데이비드 핀켈(David Finkel)이 2007년, 15개월간의 이라크 파병 이후 귀환한 참전 용사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관해 쓴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다. 그 이야기인즉슨 마일즈 텔러가 연기한 ‘아담 슈만’이라는 참전 용사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는 것. 실제로 아담 슈만은 영화 촬영에 많은 기여를 했다. 마일즈 텔러는 한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아담 슈만이 함께했다는 사실은 매우 행운이었다. 아담 슈만은 내가 질문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 있었다. 그는 내 연기의 모든 원천이었다”고 말했다.

<땡큐 포 유어 서비스> 예고편

스펙터클한 전쟁 영화를 기대하는 이들에겐, <땡큐 포 유어 서비스>는 실망을 안길 작품이다. 영화 속 전쟁 장면은 스펙터클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 속의 전쟁은 주인공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전쟁이다. 그들에게 남겨진 트라우마로서의 전쟁 말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조차도 주인공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고스란히 함께 겪게 된다는 걸 고려하면 이 작품을 함부로 추천하기가 망설여진다. 하지만 마일즈 텔러가 “우리는 전쟁터로 사람을 보내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그들을 어떻게 다시 데려오는지는 아직 모른다”고 말한 메시지만은 확실히 전해진다. 쉽지 않겠지만 한 번쯤은 참전 용사들의 아픈 경험을 영화로나마 나누어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이름보다 유명한 배역을 갖는다는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마일즈 텔러가 <위플래쉬>의 그 배우였던 덕에 우리는 <래빗홀>을, <스펙타큘라 나우>를, <블리드 포 디스>를, <땡큐 포 유어 서비스>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위플래쉬>의 그 배우가 아닌 마일즈 텔러라는 이름만으로 우뚝 설 그날을 함께 지켜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메인 이미지 photo: Bryce Duffy via ‘Rolling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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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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