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운전이 버겁다. 비좁은 골목길은 주차하기 번거롭고 꽉 막힌 도로에 서면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울은 걸을 때 살만한 도시로 탈바꿈한다. 주말 오후 선선해질 무렵 이어폰을 귀에 꽂고 꽉 막힌 차로를 굽어보자. 걸을 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 소개하려는 세 영화는 종일 걸어 다니며 각기 다른 서울을 담아낸다.

* 본문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멋진 하루>

스모키 화장을 한 ‘희수’(전도연)는 옛 남자 친구 ‘병운’(하정우)을 보러 경마장을 찾는다. 별다른 직업도 없이 이리저리 전전하던 병운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마주한다. 잔뜩 날이 선 희수는 병운에게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1년 전에 헤어진 두 남녀는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재회한다. 난데없는 빚 독촉에 병운은 당황하지만, 희수는 막무가내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결국 함께 돈을 꾸러 다니기로 한다.

일본 작가 다이라 아즈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로드무비다. 종일 눈에 익은 거리를 누비며 다양한 이를 만난다. 담배를 멋스럽게 피우는 여성 사업가, 고급 아파트에 사는 호스티스, 형편이 넉넉지 않은 대학 후배, 연락이 끊긴 사촌까지. 심기가 불편한 희수와 달리 그의 은색 승용차를 얻어 탄 병운은 태연자약하다. 병운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담보 삼아 쉽게 돈을 꾼다. 희수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옛 연인을 보며 복잡한 상념에 젖는다.

영화의 이동은 대부분 차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감정을 드러나는 순간은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설 때다. 서울 곳곳에 묻은 두 사람의 흔적이 미처 의식할 새 없이 스친다. 삼각지 근처에 자주 갔던 식당과 부암동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우산을 나눠 쓴 기억이 아련하다. 가슴 아팠던 이별은 한남동의 한 햄버거 가게에서 손을 씻다 문득 틈입한다. 영화는 용산을 지나 이태원과 종로 뒷골목까지 거닐며 그들의 기억을 그려나간다.

<멋진 하루>의 매력은 애매모호함이다. 멜로 영화처럼 다시 뜨겁게 사랑하지도, 로맨틱 코미디처럼 죽일 듯 싸우다가 느닷없이 키스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떤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다. 서울은 부지런히 걷는 두 사람 곁에 우두커니 서 있다. 영화는 이 삭막한 도시가 때론 그 익숙함에 위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볼 일을 마친 두 사람은 기약 없이 헤어졌지만,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던 희수는 사라진 병운의 자취를 한참 동안 쫓는다.

돈을 받으러 다니는 그들의 걸음이 경쾌해 보이는 이유는 음악의 몫이 크다. 다소 각박해 보이는 서울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재즈 선율이 인상적이다. 국내 퓨전 재즈 밴드 푸딩(Pudding) 김정범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탁구 복식조처럼 호흡이 척척 맞는 두 배우와 함께 멋진 앙상블을 만든다.

 

<최악의 하루>

서촌을 걷던 ‘은희’(한예리)는 우연히 길을 잃은 ‘료헤이’(이와세 료)를 안내하며 가까워진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복잡한 생각을 잊어가던 은희는 급히 남자 친구 ‘현오’(권율)의 연락을 받고 남산으로 향한다. 아침드라마에 출연하는 연예인 현오는 온갖 허세를 떨며 화를 돋운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SNS를 보고 찾아온 헤어진 연인이자 유부남인 ‘운철’(이희준)을 만나 고약한 말을 듣는다. 최악으로 치닫는 그의 하루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영화는 짤막한 산문을 읽는 기분을 안겨준다. 어느 장을 펼치면 일기처럼 감정적이고, 다른 장으로 휙 넘기면 시처럼 산뜻하다. 운율이 없이도 머리를 질끈 묶은 은희의 부지런한 걸음걸이가 리드미컬한 기분을 안긴다. 최악의 하루는 서촌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풍경이 싱그럽다. 감독 김종관은 기획 단계부터 이 영화를 걷는 영화로 생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낯선 남자와 만나 설렘에 말을 더듬고, 오래된 연인에겐 익숙함과 권태를 헷갈리는 은희의 감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걸음걸이에 선명히 새겨져 있다.

은희는 한국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지질하고 감정이 너저분한 여성이다. 그는 세 남자 사이에서 고통받는 듯 보이지만 그저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분주할 뿐이다. 은희는 남자들의 거짓말에 분노하지만, 그 역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긴 마찬가지다.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걸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닐 거예요. 진짜가 무엇일까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은희의 능청스럽고 사뭇 당당한 태도는 거짓을 연기하는 연극배우라는 그의 직업과 조응한다. 한예리의 천연덕스러운 연기 덕분에 시종일관 코믹을 자아내 심각하기보다는 유쾌한 분위기로 극을 이끈다. 거기에 김종관이 포착한 미세한 일상의 조각들이 ‘우디 앨런’을 연상시키는 재즈풍 연주곡과 만나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남산 풍경과 비좁은 골목길에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서촌과 익선동의 카페들이 사랑스럽다. 김종관 감독은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부터 장편 <더 테이블>까지 인물의 대화 사이로 비워진 감정을 포착하곤 했다. 그는 기억과 풍경, 계절과 사람, 그 모든 아름다움, 혹은 외로움처럼 일상에서 건져 올린 특별한 순간을 영화에 녹인다. 은희의 하루는 누군가 알아봐 주지 않았다면 길 위에서 뒹굴다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후죽순 피고 진 관계 속에도 위안은 있게 마련이다. 작은 골목길 어스름한 저녁 빛과 다정스럽게 사라지는 가로등 불빛처럼 소곤거리는 감정에 지친 마음을 의탁한다.

 

<북촌 방향>

대구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성준’(유준상)은 며칠간 서울에 머문다. 겉으로는 선배 ‘영호’(김상중)를 만나고 커피나 마시다 내려가겠다지만, 어쩐지 속내는 달라 보인다. 북촌 일대를 거닐며 여배우와 우연히 세 번 마주치고, 고갈비와 막걸리를 마신 후 만취한 채 옛 애인 ‘예전’(김보경)을 찾아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호는 어렵사리 성준과 그가 아끼는 후배 ‘보람’(송선미)을 만나 북촌 초입에 위치한 ‘소설’이라는 술집에서 밤을 지새운다. 그 자리에 성준의 첫 영화 주인공이었던 ‘중원’(김의성)과 옛 애인과 꼭 닮은 술집 주인(김보경)이 합류하며 이야기는 오리무중에 빠진다.

홍상수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은 신비로운 시 같은 영화다. 반복과 차이를 만드는 구조에서부터 즉흥 연주처럼 이어지는 대사가 독특한 울림을 자아낸다. 별다른 서사가 없다는 점에서 홍상수 여타 작품과 다를 바 없지만, 시간의 선형성을 무너뜨리는 구조가 도드라진다. 영화를 다 보고도 이야기를 종잡을 수 없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예측할 수 없다. 오로지 잔상처럼 남은 건 북촌이라는 공간성이다.

우연에 기댄 플롯은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성준이 걷는 골목에 다다른다. 성준은 몇몇 장소를 유령처럼 부유하며 속출하는 우연에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매일 출퇴근을 하고 동네 어귀를 산책하며 관성처럼 하루를 흘려보낸다. 마치 ‘우로보로스’ 문양처럼 제 꼬리를 물어 좀먹는 기분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보면 비루한 하루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홍상수의 북촌방향은 북촌을 부지런히 걸으며 우연과 반복이 진자 운동하는 생의 신비를 포착한다.

 

메인 이미지 <최악의 하루> 스틸컷

 

Writer

영화와 책, 그리고 예술 전반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우리 각자 1인분의 시간>, <보내지 않을 편지>가 있다.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으나 하루 세끼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
박민진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