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대도시 댄스 클럽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스윙(Swing)은 재즈 음악의 대세였다. 10여 명 이상으로 구성된 스윙 빅밴드는 인기 클럽과 장기 계약에 성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에 드리워지는 1940년도 말까지 성황리에 운영되었다. 뉴올리언스 딕시랜드 시절부터 재즈의 대표 악기였던 클라리넷은 빅밴드 시절에도 인기 악기였다. 자신의 빅밴드를 운영하던 클라리넷 연주자들은 싱글 음반으로 히트곡을 터트리며 인기 스타가 되었다. 자신의 스윙밴드를 운영하며 클라리넷 연주를 하던 세 명의 스타를 알아보았다. 당시 미국은 흑백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이라 이들 모두 백인이었던 점이 그 시대의 암운을 반영한다.

 

베니 굿맨(Benny Goodman)

베니 굿맨의 명반 <Live at the Carnegie Hall>(1939)

가난한 러시아 이민자 가정에서 열두 형제자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나 ‘King of Swing’이라 불린 스윙 시절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어린 시절 뉴올리언스 출신의 연주자들에게 클라리넷을 빠르게 배워 10대부터 음반 차트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 NBC의 라디오 프로그램 <Let’s Dance>의 MC를 맡으며 스타의 길로 들어섰고, 유력 가문 출신의 프로듀서 존 하몬드의 누이와 결혼했다. 하지만 친구였던 존 하몬드와는 자주 다투면서 서로 보지 않았고, 부인과 사별하고 나서야 처남과 화해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938년 카네기 홀 연주는 댄스 음악이었던 스윙을 감상을 위한 연주곡으로 끌어올린 기념비적 사건이었고, 이날 녹음은 스윙 시대 최고의 명반으로 남았다.

베니 굿맨 최고 히트곡 ‘Sing Sing Sing’의 카네기 공연 실황

 

아티 쇼(Artie Shaw)

베니 굿맨의 최대 라이벌 아티 쇼 역시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작곡가 콜 포터의 ‘Begin the Beguine’(1938)이 히트를 하면서 무명이었던 그의 밴드는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버디 리치(드럼)와 빌리 홀리데이를 고용한 밴드 리더로도 유명하다. 열정적인 성격의 보유자로 잦은 밴드 구성과 해체를 반복했고, 결혼 횟수는 여덟 번에 이르렀다. 그와 결혼했던 배우 에바 가드너(Ava Gardener)는 그가 폭력적인 남편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가 관여한 영화음악 ‘Nightmare’는 제임스 본드(007) 테마송과 매우 흡사하다. 최근에 <에비에이터>(2004)에 삽입되었다. 사격과 플라이피싱 분야에서도 명성을 크게 얻었던 인물이었다.

Artie Shaw ‘Begin the Beguine’(1938)

 

우디 허먼(Woody Herman)

어린 시절 고향 위스콘신의 보더빌(순회극장)에서 노래와 탭댄스를 하던 소년 우디 허먼은 12세 때부터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배웠다. 23세였던 1936년에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블루스를 연주하는 빅밴드로 명성을 쌓아 나갔다. 데카(Decca) 레코드와 계약한 지 2년 만인 1939년 ‘Woodchopper’s Ball’이 5백만 장이 팔리는 히트곡이 되며 전국구 스타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의 밴드 이름에 ‘Herd’(무리)라는 용어를 썼고, 비밥 시대로 넘어가며 네 명의 걸출한 색소폰 연주자인 ‘Four Brothers’를 구성하여 정체성과 인기를 유지했다. 말년에는 젊은 뮤지션으로 구성된 ‘Young Thundering Herds’를 이끌고 순회공연을 다녀 ‘Road Father”란 별명을 얻었다.

Woody Herman & the Swingin’ Herd ‘Woodchopper’s Ball’(Montreal,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