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 콜맨, 출처 – Metro 

올리비아 콜맨. 자주 들어본 이름은 아니다. 그럼 얼굴은? 글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영국식 영어 악센트로 수상소감을 말하는데 이 배우, 어딘가 친근하다. 내 친구가, 옆집 이웃이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올라간 느낌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올리비아 콜맨 여우주연상 소감 장면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었다. 청소부 일을 하며 배우 오디션을 봤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운 좋게 배우가 된 것까진 좋았는데 언제든 일이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늘 있었다. 자신이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건 연기인데 연기마저 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2019년, 올리비아 콜맨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하 <더 페이버릿>)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실력 있는 자가 실력만으로 인정받고 성공하는 인생 역전 스토리. 모두가 사랑하는 그런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더 페이버릿> 스틸컷

사실 올리비아 콜맨은 어디에나 있었다. 영국의 인기 드라마에도,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에도. 하지만 올리비아 콜맨 자체로 유명한 적은 없었다. 콜맨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평범하디 평범한 얼굴로 모든 역할을 투영해냈다. 마치 트레이싱지처럼 투명하게. 그리고 그렇기에 그가 연기하는 역할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온갖 감정도 적나라하게 도드라질 수 있었다. 올리비아 콜맨은 그런 배우였다. 어떤 역할도 덧입힐 수 있는 그 순백의 얼굴을 가진 배우.

여기 올리비아 콜맨이 연기했던 이름들 세 가지를 모아봤다. <디어 한나> 속 한나, <브로드처치> 속 엘리 밀러, <더 카르만 라인> 속 사라가 그것이다. 모두 다 다른 이름들이지만 한 가지만은 다르지 않다. 배우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에 한계는 없음을 알려준다는 것.

 

<디어 한나> - 한나

<디어 한나(Tyrannosaur)>는 무시무시한 영화다. ‘조셉’(피터 뮬란)이 자신의 개를 발로 차는 첫 장면부터 그렇다. 시사회 당시 첫 장면에서 자리를 뜨는 관객들이 있었을 정도. 폭력적이고 무례한 조셉도 벅찬데 거기에 ‘한나’의 사정까지 더해지면 더 견디기 힘들어진다. 결말은 또 어떤가. 해피엔딩 같은 건 없다. 다만 희망과 구원의 어떤 가능성을 남겨둘 뿐이다. 물론, 그 결말 덕분에 영화를 다 본 후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기도 하지만. 어쨌든 어디까지 우울해질 수 있을까 싶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올리비아 콜맨이야말로 한나 같은 상처받은 영혼을 연기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배우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반전 하나. 올리비아 콜맨은 이 작품 이전에 영국의 유명 코미디 배우였다. 장편영화 주연도 <디어 한나>가 처음. 이렇게 극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도 <디어 한나>가 처음이었다. <디어 한나>에서의 연기로 영국 독립영화제 여우주연상부터 선댄스 여우주연상까지 휩쓴 것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이야기다. 코미디 배우로서의 콜맨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한나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콜맨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연기를 하는 것은 내가 항상 꿈꿔오던 것”이라며 자신을 캐스팅하는 도박을 한 패디 콘시딘 감독을 실망시킬까 봐, 실제로 한나와 같은 가정폭력을 겪은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 말한다. 자신이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라 믿는다면서 말이다.

왼쪽부터 패디 콘시딘 감독, 피터 뮬란, 올리비아 콜맨, 출처 - Zimbio 

그렇다면 어떻게 <디어 한나>라는 작품이 콜맨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때는 2007년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뜨거운 녀석들(Hot fuzz)>에서 올리비아 콜맨이 마을 경찰 역할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맨이 <본 얼티메이텀> <런던 프라이드>로 유명한 패디 콘시딘을 처음 만났던 것도 바로 그때. 패디 콘시딘은 <뜨거운 녀석들>에서 올리비아 콜맨의 상대역이었다. 당시 첫 리허설에서 콜맨은 패디 콘시딘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는데 그때 콘시딘은 첫눈에 콜맨이야말로 한나 역할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단다. 어쩌면 패디 콘시딘은 콜맨에게 또 다른 문을 열어준 셈.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단편영화 <Dog Altogether>다. <Dog Altogether>는 감독인 콘시딘의 아버지가 자주 사용했던 아이리쉬 표현으로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아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단편영화는 제목과 정반대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2007년 BAFTA award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거머쥐며 영국은 물론 세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것이다.

단편영화 <Dog Altogether>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11년. 패디 콘시딘 감독은 <Dog Altogether>를 각색해 장편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왕년의 단편영화 멤버들을 불러모은다. 장편영화 시나리오엔 한나의 이야기까지 촘촘하게 추가되어 있었다. 이에 콜맨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가들까지 만나며 한나 역할을 준비한다.

<디어 한나> 스틸컷

영화 <디어 한나>에서 조셉과 한나의 우연한 만남이 서로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듯 올리비아 콜맨과 <디어 한나>와의 만남도 콜맨의 배우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작품으로 주목받은 덕분에 영화 <철의 여인>(2011)에서 마가렛 대처의 딸 ‘캐롤 대처’를 연기하게 되는가 하면(그것도 메릴 스트립과 함께!) <하이드 파크 온 허드슨>(2012)에서는 빌 머레이와 함께 출연해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맡기도 했다. 영국이 사랑한 코미디 배우가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디어 한나>가 콜맨의 경력에만 도움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올리비아 콜맨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 덕분에 내가 배우를 할 자격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콜맨은 늘 ‘내 실력은 발각될 것’이라는 생각에 초조했는데, <디어 한나>를 경험하면서 그런 초조함이 많이 사라졌다며 기뻐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도 <디어 한나>에서 콜맨이 보여준 연기 때문에, 콜맨을 <더 페이버릿>에 ‘앤 여왕’으로 캐스팅할 마음을 굳히고 콜맨의 스케줄에 맞추려 영화 촬영 일정까지 옮겼다고 한다. <디어 한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디어 한나> 예고편

 

<브로드처치> - 엘리 밀러

두 명의 경찰이 살인사건을 조사한다. 한 명은 까칠하고 인간관계에 서툴지만 냉철하고 실력 있는 형사이고, 또 한 명은 인간적이고 친화력이 좋지만 살인사건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형사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설정이다. 그동안 보았던 각종 수사물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하지만 <브로드처치(Broadchurch)>는 흔히 생각하는 수사물이 아니다. 물론 두 경찰이 만나 티격태격하며 수사를 하긴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비극적인 사건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상처와 아픔을 극복해내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핵심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올리비아 콜맨이 있다. <브로드처치>가 그저 그런 수사물이 되지 않은 건 순전히 올리비아 콜맨 덕분이다.

<브로드처치> 스틸컷

<브로드처치>는 많은 면에서 예상을 벗어난다. 에피소드마다 새로운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 과학수사대가 사건을 반전시킬 엄청난 증거를 찾아내지도 못한다. 놀라운 추리로 범인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두 경찰은 수사 내내 우왕좌왕하고, 브로드처치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한다. 그러다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기도 한다. 수사 과정보다는 등장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는, 어찌 보면 느리고 잔잔한 드라마였음에도 <브로드처치>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2013년 영국 최고의 드라마가 되었다. 특히 시즌1의 성공이 어마어마했는데 범인이 밝혀지던 마지막 회는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영국 사람들이 시청했다. 올리비아 콜맨은 드라마 마지막 회가 방영되기 직전에는 일부러 택시를 타고 다니기까지 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범인이 누구인지 하도 물어봐서였다.

BAFTA에서의 올리비아 콜맨, 출처 - Hello magazine 

이 드라마의 엄청난 흥행으로 올리비아 콜맨은 영국의 에미상인 BAFTA에서 2013년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특히 마지막 회에서 올리비아 콜맨이 보여준 연기가 장안의 화제였는데, 그 연기는 마침내 밝혀진 범인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 스포일러가 될까 더 이상 얘기할 수는 없지만 <디어 한나>에서 한나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의 그 연기에 버금가는 연기였다는 건 말할 수 있다. 콜맨의 그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이 배우의 한계는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브로드처치> 스틸컷

시즌3으로 마무리된 <브로드처치>는 경고하건대 함부로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일단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부디 시간이 넉넉할 때, 체력이 뒷받침될 때 시작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마 한동안은 <브로드처치>의 여운에서,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에서 헤어나오기 힘들 것이다.

<브로드처치> 시즌1 예고편

 

<더 카르만 라인> - 사라

어느 날, 엄마가 하늘로 둥둥 떠오른다면 어떨까? 말 그대로 공중부양을 한다면. 처음엔 한 뼘 정도 떠 있다가 얼마 후엔 지붕에 구멍을 내야 할 정도로 솟아오르고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배낭을 메고 산소호흡기를 끼고 공기가 희박한 곳까지 올라가게 되는 거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끌어내려지지 않는 엄마를, 매일 조금씩 조금씩 하늘 위로 떠오르는 엄마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떨까. 이는 다름아닌 단편영화 <더 카르만 라인(The Karman Line)>의 줄거리다. 이 영화는 어느 날부터 하늘로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어떤 엄마의 이야기다.

<더 카르만 라인> 스틸컷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과학적으로 근거도 없고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어쩐지 우리 모두 겪어봤던 일처럼 느껴진다. 가족과의 어쩔 수 없는 이별. 그 앞에 무력한 우리의 존재. 그로 인한 슬픔까지. 어째서일까. 사실 이 모든 이야기가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건 엄마 ‘사라’ 역을 맡은 올리비아 콜맨의 연기 덕분이다. <더 카르만 라인>을 보며 우리는 콜맨이 울면 함께 울고, 웃으면 함께 웃는다. 콜맨이 땅으로 내려서고 싶어 발 끝을 움직이면 우리의 발 끝도 따라 움찔움찔댄다. 올리비아 콜맨은 이렇듯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오스카 샤프 감독이 이 단편영화에 올리비아 콜맨을 공중부양하는 엄마로 캐스팅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더 카르만 라인> 스틸컷

오스카 샤프 감독은 불현듯 공중부양하는 어떤 여자 이미지를 떠올렸다. 전후 사정이나 어떤 이야기도 담겨있지 않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는 머릿속을 계속 떠돌다가 샤프 감독의 어머니가 말기 백혈병 진단을 받으면서 본인의 이야기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 후 각본가 다운 킹을 만나며 이야기는 더욱 구체화되었고, 제목 또한 <더 카르만 라인>이 된다. 엔지니어이자 물리학자인 시어도어 폰 카르만((Theodore von Karman, 1881~1963)이 도입한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선 ‘카르만 라인’을 뜻한다.

<더 카르만 라인> 스틸컷
<더 카르만 라인> 스틸컷

공중부양하는 엄마 역할이었기에 콜맨은 영화 내내 와이어에 매달린 채 연기를 해야 했다. 나중에는 와이어에 피부가 쓸려 생리대를 사서 와이어와 피부 사이에 붙여가며 촬영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콜맨은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1분 전까지만 해도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사람들을 웃기던 콜맨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엄마 사라로 180도 돌변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와이어에 매달린 채 그린 스크린 앞에서 인공 강풍에 맞서 연기를 하는 올리비아 콜맨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카르만 라인’에 점점 다가서는 사라의 외로운 여정만이 보일 뿐이다.

단편영화 <The Karman Line>

올리비아 콜맨은 뒤이어 놀랍게도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더 크라운>에서 클레어 포이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 여왕 역할을 맡은 것. 세 번째 여왕 역할이다. 세 번째라니. 올리비아 콜맨이 다른 영국 배우들에 비해 여왕 역할을 계속 맡아야 할 만큼 고풍스럽고 위엄있어서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올리비아 콜맨만이 여왕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끌어낼 적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 페이버릿>의 앤 여왕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더 크라운> 스틸컷, 출처 – Harper's Baza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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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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