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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앨범을 누가 듣습니까?!”

아직도 이 소리를 들었던 날을 떠올리면, 씁쓸하고 헛웃음이 나온다. 이쪽에선 흔한 얘긴데 뭘 새삼스럽게 그러느냐고? 맞다. 사람들이 앨범을 듣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을 ‘앨범제작지원사업’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사람이 했다면 어떨까? 해당 발언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콱! 하고 막혀왔다.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이 자리에 나온 거지?’

미디어 관계자, 음악산업 관계자, 평론가, 아티스트 등등, 저마다 앨범을 듣지 않는 현시대를 두고 한 마디씩을 던진다. 마치 음악판의 생리와 흐름을 완벽히 꿰고 있다는 듯이. 그 속에선 진지한 고민과 걱정, 선민의식과 오만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곧 그들은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대개 결론은 두 갈래로 나뉜다. ‘대중이 앨범을 안 들어.’, ‘앨범의 시대는 갔어.’. 근거로써 세계의 현황을 잣대로 들이대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다소 경솔하게 내린 단정이다. 적어도 앨범의 시대는 아직 저물지 않았다.

본 이미지는 본문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2018년 대구음악창작소에서 진행했던 앨범제작지원사업 안내 이미지

일단 오늘날의 대중음악계에서 앨범보다 싱글이 우선순위에 놓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세계 대중음악의 흐름을 선도하는 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중이라고 해서 특별히 앨범을 더 많이 듣는 것은 아니다. 싱글 위주의 감상과 소비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다만, 한국음악시장에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짙게 드러날 뿐이다. 기존 음악 감상의 패러다임이 변화함에 따라 앨범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나 현실을 대하는 뮤지션과 매체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국내와 국외 대중음악계의 온도 차는 확연히 다르다. 제작이 점점 움츠러들면서 앨범, 정확하게는 ‘풀 렝스(Full-Length) 앨범’이란 포맷의 가치 또한, 곤두박질친 한국 대중음악계와 달리 저들은 지금도 많은 양의 앨범을 찍어내고 평가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소장과 수익 면에서의 가치는 떨어졌을지언정 앨범 자체가 지니는 무게감은 유효하다. 각종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대중음악 관련 담론에서도 앨범은 여전히 중심부에 놓여있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의 주인공 ‘스타로드’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믹스테이프 이미지 Via ‘TheVerge

특히, 힙합 신의 경우엔 오히려 더 많은 양의 앨범이 발매되는 중이다. 아티스트들은 앨범 판매만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본인의 브랜드를 높이고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데 여전히 앨범을 이용한다. 단지 그 배포 방식이 100% 유료였던 것에서 무료 공개를 포함하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미국 시장과 한국 시장을 일대일 비교하는 건 무리다. 미국 힙합 신에선 무료 앨범, 혹은 믹스테이프(Mixtape)를 통해 음악적으로 인정받고 인지도를 높이게 되면, 굳이 현실적인 부분과 타협하지 않아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창구가 열린다. 공연, 유명 레이블과의 계약, 유명 아티스트와의 작업 등을 통해서다. 반면, 한국에선 기껏해야 일부 장르 팬의 지지를 얻는 게 전부다.

그렇기에 적어도 한국에서 영세한 규모의 레이블이나 뮤지션이 (EP 포함) 앨범 제작에 부담을 느끼는 현실은 공감할만하다. 문제는 창작 집단보다도 음악산업 관계자들과 미디어가 앨범을 대하는 태도다. 열악한 제작 여건과 앨범을 향한 지지마저 사라진 현실 속에서 국내의 많은 아티스트는 앨범 제작에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발표되는 양은 계속 줄어들고, 그나마 형성되던 일부 담론마저 사라져간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앨범의 가치를 지켜주고 끊임없이 상기해줘야 할 마지막 한계선은 결국, 전문가들과 미디어다.

해외 대표적인 종합 장르 매거진 <피치포크>

국외의 경우를 살펴보자. 피치포크(Pitchfork), 롤링 스톤(Rolling Stone) 같은 종합 장르 매거진부터 힙합 디엑스(HipHopDX), XXL 등의 장르 매거진 모두, 리뷰의 중심이 되는 건 싱글이 아닌 앨범이다. 가장 업데이트 주기가 빠르고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뉴스란 역시 특별한 이슈가 결부되거나 슈퍼스타급이 아닌 이상, 앨범 발매를 중요하게 다룬다. 아티스트의 커리어를 논하고 평가하는 데에 앨범 단위의 결과물은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어느 순간 평단은 '트렌드를 무시해선 안 된다.'라는 미명, 또는 업데이트 양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방편 아래 싱글 이야기, 혹은 리뷰를 쏟아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한, 수많은 라디오와 TV 채널들은 앨범커녕 아이돌 외의 음악 자체를 등한시해왔다. 미디어가 아티스트에게 원하는 건 앨범과 음악 이야기가 아니라 애교와 개그다. 이처럼 많은 이가 앨범을 경시하는 풍조 속에서 '잘 만든 앨범'이 갖는 가치마저 퇴색하고 있다. 뮤지션의 유명세나 뒤태에 목숨 거는 연예매체들이야 그렇다 치고 전문가나 장르 팬들까지도 무감각해지다 보니 아티스트들은 좋은 앨범을 만드는 것보다 인맥 쌓기와 방송 타기에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켄트릭 라마 Via ‘Discog

인정받는 앨범 한 장 없는 아티스트들이 여기저기서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포장되거나 베테랑 행세를 하고, 몇 년에 이르는 활동 기간에 단 한 장의 앨범조차 내지 않은 이들이 싱글 몇 개와 방송 출연으로 행사 페이를 올리는 모습은 너무 씁쓸하다. 그저 노래 좀 잘하고 오래 활동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쉽게 '전설'이란 칭호를 남발하는가? 뛰어난 앨범이 없이도 스타는 될 수 있지만, 거장이나 전설이 될 순 없다.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린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Bitch, Don’t Kill My Vibe’ 같은 싱글이 아니라 석 장의 끝내주는 앨범 덕이다. 더불어 제이 콜(J. Cole)처럼 이미 많은 돈을 버는 랩 스타들도 지난 앨범에 가해진 비판에 신경 쓰며, 끊임없이 걸작에 대한 욕구를 내비친다. 이렇듯 지금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앨범을 만드는 일'이고, 평단과 미디어, 그리고 장르 팬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에 놓이는 것 역시 '앨범'이다. 지금이라도 국외의 유명 토크쇼를 검색해보시라. 진행자가 초대손님으로 나온 아티스트의 새 앨범을 직접 들고 언급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019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을 수상한 장필순

싱글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티스트와 앨범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갈수록 앨범의 가치는 더욱 희석될 것이고, 어쩌면 앨범이라는 단위 자체가 재정의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땅에선 너무 쉽게 앨범의 소중함과 가치를 잊은 듯하여 매우 섭섭하다. 아티스트를 향해 ‘왜 앨범을 만들지 않느냐.’라고 묻기 전에, 그리고 ‘요즘 앨범을 누가 듣습니까.’라고 단정하기 전에 이 같은 현실을 만든 것이 과연 누구인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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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리드머/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