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씩 수작업으로 그리던 셀애니메이션에서 모션 그래픽까지. 기술의 발전으로 애니메이션을 정의하는 범위와 영역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때문에 현대에 제작되는 셀애니메이션에도 거의 필수적으로 추가적인 그래픽 작업이 동반되지만,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아날로그를 대변하고 있다. 제작 특성상 만드는 사람의 손길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라 어딘가 장인(匠人)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애니메이션만이 전달할 수 있는 특유의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까닭이다.

실사 영상에서 구도와 색, 모양과 프레이밍을 아무리 치밀하게 구성한다 하더라도 분명 구현하기 어려운 부분의 미장센까지 애니메이션은 창조할 수 있기에, 애니메이션이 갖는 매력은 그만큼 강력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음악과 만나 더욱 풍성한 스토리텔링을 전해주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들을 꼽아보았다.

 

1. Dan Croll ‘Tokyo’

‘Tokyo’는 영국 싱어송라이터 댄 크롤의 정규앨범 <Emerging Adulthood> 10번에 수록된 곡이다. 뮤직비디오에는 댄 크롤의 모습과 똑 닮은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는 어딘가 꿈 같은 정사각형의 공간 안에서 4분 53초 동안 허우적댄다. 재치와 혼란 사이를 오가는 이미지들의 나열, 은유에 기대 있는 표현들의 연속이지만 단순한 색의 조합과 여백이 주는 즐거움도 함께 공존한다.

복고풍의 사운드와 나른한 보컬의 합이 잘 어우러지는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파스칼 보리스(Pascale Bories)와 사이먼 랜드레인(Simon Landrein)이 제작했다. 전체적인 작화를 디자인한 사이먼 랜드래인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애니메이터다. 간결한 선과 색들은 어쩐지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특유의 익살스러움을 조미료처럼 잘 버무려내 강한 개성으로 탄생시켰다. 현재도 다수의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뉴욕 타임즈, 와이어드 매거진, 파울렛 매거진 등 다양한 신문과 매체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면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을 확인해보자.


Simon Landrein
홈페이지
Simon Landrein 인스타그램

 

 

2. 차이쉬쿤(蔡徐坤) ‘No Exception(没有意外)’

올해 2월에 발매되었던 곡이다. 1998년생의 중국 아역배우 출신인 차이쉬쿤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현재 중국에서 아이돌 그룹 NINE PERCENT의 리더로 소속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가 이번엔 솔로곡을 발표했다. 이별로 인한 부재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직접 작사에도 참여했다.

멀어지고 있는 겨울을 배웅하기에 제격인 뮤직비디오는 한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VCR WORKS에서 제작했다. 다수의 광고 및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이력이 있는 VCR WORKS에는 다재다능한 여러 아티스트들이 소속되어 개개인의 역량을 한데 모아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뮤직비디오에서도 겨울의 일상이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공허하지만 유려하게 그려졌다.

달이 왕관이 되고 왕관은 곧 반지가 되며, 부서진 달의 파편 사이를 유영하는 자동차 곁으로 달이었던 새들도 함께 날아간다. 가사를 반영한 상징들은 서로를 비추고 하염없이 떠다닌다. 섬세하고 차가운 공기가 잔잔하게 흘러가는 뮤직비디오에선 차이쉬쿤의 목소리와 함께 그림들도 노래한다.


VCR WORKS 홈페이지

 

 

3. MISO ‘Take Me’

미소(MISO)는 2016년 싱글 앨범 <Take Me>로 데뷔한 국내 뮤지션이다. 한국인 최초로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에 참가했으며, 현재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 소속으로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감독과 애니메이션을 맡은 시반 키드론(Sivan kidron)을 비롯해 3D 일러스트 및 추가 애니메이션, 채색까지 7명의 아티스트가 함께했다.

시반 키드론은 이스라엘 태생으로 런던의 왕립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이자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일러스트로 그려진 ’Take me’는 댄 크롤의 ‘Tokyo’와는 또 다른 결의 몽상을 보여준다. 시반 키드론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뮤직비디오의 주제를 간단한 코멘트로 소개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보는 모든 것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느낌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다고. 뮤지션 미소는 이러한 감정들이 한국의 이미지로서 담겨 지기를 원했고, 그것이 시반 키드론의 손을 거쳐 새로운 느낌의 뮤직비디오로 탄생했다.


Sivan Kidron 홈페이지

 

 

4. 혁오 ‘TOMBOY’

‘나만 알고 싶은 밴드’라는 대명사를 만들어낸 장본인 밴드 혁오. 어느새 대중문화의 한가운데에 서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혁오다운’ 모습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한다. 어디에도 물들거나 흡수되지 않고 자기만의 고유한 정서를 계속해서 퍼트리는 일은 밀도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원했건 원치 않았건 한순간에 쏟아진 관심과 과도하게 소비되었던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혁오는 정규앨범 <23>을 만들고, 더블 타이틀곡 중 하나인 ‘TOMBOY’를 만들어냈다.

2017년 4월 음반 발매와 함께 공개되었던 ‘TOMBOY’의 뮤직비디오는 화가로 활동하는 박광수 작가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이는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의 이례적인 만남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광수 작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하고, 이어 동 대학원에서도 조형예술을 전공했다. 2008년의 단체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꾸준히 개인전과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TOMBOY’ 뮤직비디오 캡쳐

작가는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뮤직비디오 제작기간으로 1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만드는 동안 때때로 혹은 하루종일 톰보이를 들으며 이야기와 장면을 구상하고 그렸다고. 밴드 혁오가 노래하는 젊음과 사랑, 이별의 공허에 대한 메시지가 불과 연기, 숲 속 존재들의 모습에 잘 담겨 지길 원하며 제작했다고 한다.

뮤직비디오에 적용된 기법은 영상 위에 그림용 필름지를 대고 한 장씩 트레이싱하는 로토스코핑 방식이다. 거친 선들이 모여 보여지는 모션은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이고 강렬하며, 가사와 맞물려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킨다. 그는 ‘TOMBOY’ 뮤직비디오의 감독으로서 페이스북 및 공식적인 매체들을 통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숲속에 모닥불 하나가 타오르고 연기가 난다. 얼마 후 연기는 불에서 떨어져 나와 그를 떠나가고 숲에 남겨진 불은 연기를 그리워하며 천천히 춤을 춘다. 불이 추는 춤은 숲을 조금씩 태우고 자신을 분열시키며 수많은 불들을 만들어 간다. 이 뮤직비디오는 불과 연기가 등장하는 이별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은 이별에 처한 뒤섞인 감정과 격한 몸짓들 그리고 연소되어가는 사랑과 젊음의 은유로 볼 수 있다. – <엠넷>에서 발췌


박광수 인스타그램
박광수 페이스북

 

 

Writer

그림으로 숨 쉬고 맛있는 음악을 찾아 먹는 디자이너입니다. 작품보다 액자, 메인보다 B컷, 본편보다는 메이킹 필름에 열광합니다. 환호 섞인 풍경을 좋아해 항상 공연장 마지막 열에 서며, 동경하는 것들에게서 받는 주체 못 할 무언가를 환기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