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그뿐인가. 주어진 이야기에, 정해진 결말에도 좀처럼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두 가지 결말을 모두 보여주던 그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부터 ‘결투는 72페이지, 도망은 50페이지를 펴시오’라고 쓰여 있던 어린 시절 게임 북까지 인간의 욕심 덕분에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를 거듭해왔다.

넷플릭스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그리고 얼마 전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이하 <밴더스내치>)가 넷플릭스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공이 먹을 시리얼 브랜드 하나부터 누군가를 죽일지 말지 까지 시청자가 리모콘 하나로 직접 결정하는 드라마.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드라마. <밴더스내치>를 보다 보면 어쩐지 일개 시청자일 뿐이었던 내게 전지전능한 능력이 주어진 것만 같다. 신적인 존재가 된 듯한 이 느낌이야말로 <밴더스내치> 같은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의 매력일 터. 최근 <밴더스내치>를 통해 이러한 매력에 흠뻑 빠진 당신이라면, 그래서 자신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당신이라면, 여기 <밴더스내치>보다도 훨씬 앞서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열광케 했던 광고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영국 경찰과 중앙정보국(COI)의 <Choose A Different Ending>

캠페인 설명 영상

때는 2009년. 영국은 시도 때도 없이 칼을 휘두르는 10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거의 매일 런던의 누군가가 칼에 찔려 죽거나 다쳤다. <타임> 지는 ‘테러 다음으로 런던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10대의 나이프 범죄’라는 기사까지 실었다. 결국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던 영국 경찰은 칼을 들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10대들에게 대대적으로 알려야 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 기업도 아닌 정부기관에게 엄청난 예산이 드는 초호화 광고 캠페인은 사치일 뿐. 결국 조금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인터랙티브 바이럴 필름, <Choose A Different Ending>이다. 총제작비는 5만7천 파운드. 우리나라 돈으로 약 8천5백만 원. 매체는 TV도, 잡지도, 라디오도 아닌 유튜브였다.

첫 번째 영상
영상 스틸컷, 출처 – Light touch learning

2009년 5월의 어느 날, 영상 한 편이 덩그러니 유튜브에 올라왔다. 어떤 브랜드의 어떤 캠페인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1인칭 시점에 다소 거친 퀄리티의 영상. 내용은 단순했다. 주인공이 칼을 소지할 것인지 아닌지를, 영상을 보는 유저가 결정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다음부터 시작되었다. 유저가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에 따라 다른 동영상이 업로드된 곳으로 자동으로 넘어갔다. 유저의 결정에 따라 각기 다른 동영상 링크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만 하면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업로드된 영상은 총 21개. 엔딩은 10개.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 다른 엔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Choose A Different Ending>의 구조, 출처 – cloudfront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특히나 타깃이었던 10대들이 열광했다. 온라인상에서는 각자 경험한 다른 이야기와 엔딩에 대해 토론이 이어졌다. 총 조회수는 260만 건. 가성비도 확실했다. TV 광고비의 6분의 1 수준의 비용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칸 광고제에서도 4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성과는 10대들이 무심코 한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다는 것.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말이다.

<Choose A Different Ending> 유튜브 채널

 

13th street 채널의 <Last Call>

캠페인 설명

2011년, 독일의 몇몇 영화관에서는 본 영화 시작 전 공포영화 한 편이 상영됐다. 한 여자가 살인마를 피해 폐쇄된 요양원 안을 도망 다닌다는 줄거리의 아주 짧은 단편 영화였다.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집약해놓은 듯한 스토리였지만, 이 영화에는 조금 남다른 면이 있었다. 바로 주인공이 직접 관객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한다는 것. 왼쪽으로 가야 할지, 아래층으로 가야 할지, 다른 피해자를 구해야 할지 주인공은 끝없이 관객에게 묻고, 관객이 말하는 그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이 이어지면서 결말은 완전히 달라졌다. 해피엔딩이 되기도, 새드엔딩이 되기도 했다. 모든 것은 관객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달려있었다. <밴더스내치>의 영화관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리모컨 대신 핸드폰을, 목소리를 활용한 것이다.

<Last Call> 스틸컷, 출처 – this is not advertising

사실 이 영화는 독일의 공포/서스펜스 영화 전문 채널 13th street가 자신들의 채널을 알리기 위해 만든 광고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13th street는 자신들의 채널을 좀 더 획기적으로 알릴 방법을 고민하던 중 아이디어를 냈다. 관객을 공포영화에 참여시키자. 일단 영화관에서 티켓을 구매할 때 이벤트 응모인 척 관객들의 전화번호를 수집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중 하나의 번호에 전화를 걸어 관객의 답변에 따라 미리 시뮬레이션해둔 스토리가 전개되도록 한 것이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새로 개발한 소프트웨어 덕분. 사람의 음성을 인식해 이를 명령어로 변환한 후, 준비된 영상을 선택하는 기술의 소프트웨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동 여론조사에 쓰이곤 하던 기술을 영화의 스토리 진행에 활용한 것이다.

샘플 영상

반응은 역시나 뜨거웠다. 각종 영화 잡지, 포럼, 블로그 등에 수백 편의 글이 올라왔고, 13th street는 자신들이 공포영화 채널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13th street 채널은 칸 광고제에서 3개 부문 수상이라는 선물도 받았다. 선물을 받은 것은 13th street만이 아니다. 전화를 받은 관객 또한 영화 속 주인공과 통화를 하고 있고, 주인공의 운명을 자신이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굉장한 몰입감을 선물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살인마가 주인공의 핸드폰을 주워 전화를 받고 있던 관객에게 “네 번호를 알아냈어. 다음 희생자는 너야.”라고 말하는 것까지 들었다면 아마 엄청난 공포감도 더불어 선물 받았을 것이다.

 

Tipp-Ex의 <A Hunter Shoots a Bear>와 <Hunter and bear’s 2012 birthday party>

<A Hunter Shoots a Bear> 시작 영상
<A Hunter Shoots a Bear> 데모 영상

이번에는 곰과 사냥꾼이다. 이 무슨 이솝우화 같은 조합이란 말인가. 브랜드는 Tipp-Ex. 세계적인 문구 브랜드 Bic의 수정 테이프 브랜드다. 처음 시작은 단순하다. 사냥꾼이 곰을 쏠지 말지 영상을 보고 있던 유저에게 결정을 맡긴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인터랙티브 영상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수정 테이프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곰을 쏜다’를 선택하든, ‘곰을 쏘지 않는다’를 선택하든 사냥꾼은 어차피 곰을 쏠 마음은 없다며 영상 화면 밖의 광고창에 있는 Tipp-Ex 수정테이프를 가져와 제목에 있던 Shoots라는 동사를 지워버린다. 그리고는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빈칸을 채우라고 이야기한다. 이 광고의 백미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3th street의 공포영화나 영국 경찰의 <Choose A Different Ending>에서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아야 두세 가지였던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빈칸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다. ‘Love’를 넣어도 좋고, ‘Eat’을 넣어도 좋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사를 넣어도 좋다. 선택권이 이렇듯 무궁무진해진다. 야한 단어를 넣으면 19금 화면이 나오기도 하고, 말이 안 되는 단어를 넣으면 곰이 도저히 못 하겠다며 손사래를 치기까지 한다. 이렇게 준비된 영상은 총 50개. 이런저런 동사를 입력하면서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A Hunter Shoots a Bear> 스틸컷, 출처 – this is not advertising

그 쏠쏠한 재미를 느껴보고자 하는 사람은 예상외로 엄청나게 많았다. 론칭 100일 만에 3550만 뷰를 기록했고, 총 4600만 명이 참여했다. 그중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있었다. Tipp-Ex 공식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이 캠페인 이후 3천만 명 이상 늘었다. 또 유럽 지역에서만 판매량이 전년 대비 35% 가까이 증가했다. 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다음 해에는 후속 캠페인까지 나왔다.

<Hunter and bear’s 2012 birthday party> 시작 영상

후속 캠페인에도 곰과 사냥꾼은 다시 등장한다. 이전 캠페인에서 이미 사이가 돈독해진 곰과 사냥꾼. 후속 캠페인에서는 사냥꾼이 곰을 위해 생일 파티를 연다. 하지만 때는 2012년.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종말의 해. 안타깝게도 곰의 생일 파티 현장에 유성이 날아든다. 그리고 또다시 나타나는 선택지. 생일 파티를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선택해도 생일 파티는 계속된다. 다만 이번에는 제목의 ‘2012’가 지워진다. 어떤 숫자라도 입력할 수 있다. ‘0’을 입력해서 예수가 탄생하던 마구간에서 생일 파티를 열 수도 있고, ‘1940’을 입력해 2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생일 파티를 열 수도 있다. 검투사가 될 수도, 원시 부족이 될 수도 있다. ‘2000’을 입력하면 또 어떤가. 밀레니엄 에러가 뜨기도 하는데 이 에러가 너무 리얼해서 정말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식으로 준비된 엔딩만 40여 가지. 이 캠페인에 열광하는 열성 팬들은 아래와 같은 공략집을 마련하기까지 했다.

공략집,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행복한 큐브’ 

곰과 사냥꾼. 단 두 명의 광고 모델. 싸구려 세트. 이런 단출한 조합으로 이 정도의 성공을 이끌어낸 것을 보면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좌지우지하겠다’는 인간의 욕망, ‘숨겨져 있는 새로운 것을 찾겠다’는 인간의 본능은 참으로 무시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캠페인 설명 영상

 

메인 이미지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 스틸컷, 출처 – Screen rant

 

 

Writer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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