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감독이 특정 배우와 자주 호흡을 맞출 때, 그 배우를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감독이 구축하는 세계에 배우만 있는 건 아니므로, 배우만 페르소나인 것은 아니다. 감독이 자주 호흡을 맞추는 스태프들 또한 세계를 함께 창조하는 페르소나들이다.

몇몇 감독은 자신이 구현할 세계의 탄탄한 골격을 만들어주는 각본가들과 자주 작업을 한다. 이들은 감독들의 페르소나 각본가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세계를 의뢰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신뢰가 필요한 일이다. 즉, 창작자의 페르소나가 된다는 건 믿음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뜻이다. 영화감독들의 페르소나가 된 각본가들이 만들어낸, 믿음의 결과물인 아름다운 작품들을 살펴보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페르소나,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가 폴 슈레이더

왼쪽부터 차례로 <택시 드라이버>의 주연 로버트 드니로, 각본가 폴 슈레이더, 감독 마틴 스콜세지. 출처 - ZIMBIO

2018년 뉴욕 비평가 협회상과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에서 각본상을 받고,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 후보에 오른 이가 있으니 바로 ‘폴 슈레이더’다. 자신의 연출작인 <퍼스트 리폼드>(2017)로 많은 영화제의 각본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는데, 그는 스무 편이 넘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자 각본가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그를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성난황소>(1980), <택시 드라이버>(1976)의 각본가로 기억하고 있다.

폴 슈레이더는 닉 녹테 주연의 <어플릭션>(1997), 리차드 기어 주연의 <아메리칸 지골로>(1980) 등 많은 작품을 연출했지만, 그의 출발은 각본가다.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암흑가의 결투>(1975)의 각본을 쓰면서 각본가로 데뷔했고, <강박관념>(1976)과 <모스키토 코스트>(1986)로 각각 브라이언 드 팔마와 피터 위어와 작업하는 등 자신의 연출작 외에도 다른 감독들의 작품에 각본가로 참여했다.

폴 슈레이더가 작업한 각본은 많지만, 그의 각본은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할 때 가장 빛난다.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성난황소>(1980),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비상근무>(1999) 등의 각본을 맡았는데,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제29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택시 드라이버>(1976)다.

<택시 드라이버> 트레일러

폴 슈레이더가 쓴 각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부조리한 세계를 냉소적으로 다룬다는 거다. <택시 드라이버>는 그런 그의 세계관의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택시 운전을 하는 퇴역 군인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니로)은 늘 불면증에 시달리고, 뉴욕의 밤거리가 추악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트래비스가 불만을 품고 저지르는 사건에도 불면, 외로움, 뉴욕의 밤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운행 뒤에 차고로 들어왔다가 다음날이면 다시 나오는 택시의 동선은, 무슨 일을 저질러도 해소되지 않고 반복되는 트래비스의 불만과 닮았다.

 

이안 감독의 페르소나, <와호장룡>의 각본가 제임스 샤머스

<와호장룡>의 각본가 제임스 샤머스(왼쪽)와 감독 이안(오른쪽). 출처 - INDIEWIRE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 감독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항상 ‘제임스 샤머스’가 있다. 제임스 샤머스는 이안 감독의 데뷔작부터 20년 넘게 호흡을 맞춰왔다. 이안 감독의 작품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에 기획, 제작, 각본으로 참여해왔으며, <인디그네이션>(2016)으로 감독 데뷔도 했다.

제임스 샤머스는 <테이킹 우드스탁>(2009)까지 이안 감독이 연출한 모든 작품에 기획, 제작, 각본 등으로 참여했다. 이안 감독의 데뷔작 <쿵후 선생>(1992)을 비롯해서 제4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결혼 피로연>(1993),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색,계>(2007) 등 각본으로 참여한 작품이 많은데, 특히 <아이스 스톰>(1997)은 제50회 칸영화제에서 제임스 샤머스에게 각본상을 안겨줬다.

제임스 샤머스가 각본으로 참여한 작품을 보면 난처한 상황에서 정서적 불안을 느끼는 인물이 등장한다. 관객들에게 인물의 복잡한 감정이 얼마나 잘 전달될지가 관건인데, 제임스 샤머스는 그 역할을 탁월하게 해낸다. 이런 그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이안 감독과 제임스 샤머스가 호흡을 맞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바로 <와호장룡>(2000)이다.

<와호장룡> 트레일러

<와호장룡>은 무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마음을 다루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모백’(주윤발)과 ‘유수련’(양자경)은 서로 사랑하지만 과거 때문에 솔직하게 표현 못 하고, ‘옥교룡’(장쯔이)은 무예에 큰 잠재력을 가졌지만 이모백과 ‘푸른 여우’(정패패)의 서로 다른 방법론 중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풀어낼지 고민한다. <와호장룡>에 등장하는 결투들은 결국 답이 없는 삶에서 인간이 하는 매 순간의 선택이 투쟁에 가깝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켄 로치 감독의 페르소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각본가 폴 래버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각본가 폴 래버티(왼쪽)와 감독 켄 로치(오른쪽)

켄 로치 감독은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가 늘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 때 함께 하는 이가 바로 ‘폴 배러티’다. 폴 래버티는 <칼라 송>(1996)이후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까지 켄 로치 감독의 전담 각본가로 참여 중이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감독과 배우로 시작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 능숙하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폴 래버티가 출연하면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다.

폴 래버티는 다양한 지역에서 살아봤고, 인권단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경험을 토대로 완성도 높은 각본들이 완성됐고, <달콤한 열여섯>과 <자유로운 세계>(2007)로 각각 칸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켄 로치 감독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두 번이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폴 래버티의 각본이 가진 힘이 크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고 처음으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소재로 한다. 켄 로치 감독이 왜 전쟁영화를 찍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텐데, 폴 래버티가 각본을 맡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결국 계급투쟁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으로 인해 사회가 변할 때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투쟁하는 이들을 중점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트레일러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형제인 ‘데미안’(킬리언 머피)과 ‘테디’(페드레익 들러니)는 함께 싸우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한다. 데미안은 집단의 배신자로 밝혀진 친구를 죽이면서 조국이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건가, 라고 하소연한다. 지도자들의 결정으로 이뤄진 전쟁에서 죽는 이들은,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는 시민들이다. 폴 래버티는 늘 약자의 편에 서서 이야기해왔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전쟁의 비극을 겪은 모든 이들을 애도한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페르소나, <허트 로커>의 각본가 마크 볼

<허트 로커>의 각본가 마크 볼(오른쪽)과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왼쪽)

캐서린 비글로우는 긴장감 넘치는 액션을 탁월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그런 그의 커리어에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각본가 ‘마크 볼’과의 만남이다. 마크 볼은 이라크에서 종군 리포터로 활약하며 많은 글을 남겼다. 두 사람은 <허트 로커>(2008)를 시작으로, <제로 다크 서티>(2012), <디트로이트>(2017)까지 세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한 <허트 로커>다. <허트 로커>는 제8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마크 볼은 각본가 데뷔작인 <허트 로커>로 데뷔와 동시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상을 받은 여성이 됐다.

<허트 로커>는 마크 볼이 바그다드에서 폭발물 제거반 대원들과 생활했을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허트 로커>는 저널리스트 크리스 헤지스의 저서에서 인용한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이는 폭발물 제거반에 새로 부임한 팀장 ‘제임스’(제레미 레너)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허트 로커> 트레일러

제임스는 임무 수행 과정에서 팀원들이 만류함에도 독단적으로 폭탄 제거를 한다. 팀원들은 제임스를 걱정하지만, 제임스는 폭탄 제거에서 쾌감을 느낀다. 목숨을 건 경험에 익숙해진 이에게 파병 생활이 끝난 뒤의 평화는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까. <허트 로커>를 보고 제임스에 대한 평은 갈릴 수 있겠지만, 그는 미군의 유능한 인재라기보다 위험에 중독된 전쟁의 희생양처럼 보인다.

 

메인 이미지 출처 – IMDb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