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의 그림은 발음할 때마다 독특하고 생경한 그의 이름을 똑 닮았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곳,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묘하고 의미심장한 곳. <소피의 세계> 표지 삽화로 유명한 독일 일러스트레이터 크빈트 부흐홀츠의 세계로 초대한다.


처음 접했을 때 ‘마법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의 그림은 문득문득 어떤 것들을 연상시킨다. 초현실적인 풍경에서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캔버스 위에 콕콕 찍혀 그 풍경을 자아낸 수많은 점들에서는 쇠라의 그림이. 때로는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이나 특정한 시간대가 떠오를 때도 있다. 이를테면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새벽이나 희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그러니까 어딘가 몽롱한 느낌을 풍기는 것들.



그곳에서는 늘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책은 문자 그대로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고, 통통배를 빌리려 찾은 선착장에선 손님을 기다리던 거대한 물고기를 마주치는 식이다. 환상적이라면 환상적이고 기괴하다면 기괴한 일들은 지난밤 꿈처럼 아스라한 풍경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보고 있자면 그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든다. 크빈트 부흐홀츠는 이렇게 묘한 그림들을 각종 책에 채워 넣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지어 왔다.



그중에서도 <책그림책>은 스토리에 맞추어 삽화를 제작하는 대부분의 책과 정확히 반대로 제작된 흥미로운 작품이다. 탄생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책의 일생을 소재로 한 그의 그림 46점에, 46명의 작가가 기고한 글을 이어붙인 것이다. 그림에 대한 감상문부터 짤막한 단상, 한 페이지 분량의 소설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지만 전 세계에서 참여한 작가들의 이름부터 어마어마하다. 밀란 쿤데라, 수전 손탁, 존 버거, 오르한 파묵…. 마이클 잭슨과 데이비드 보위, 퀸이 한 무대에 오른다거나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박찬욱이 함께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책그림책>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팬들뿐 아니라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그 후로 비슷한 프로젝트를 통해 두 권의 책을 탄생시켰다. 바로 물을 소재로 한 <호수와 바다 이야기>, 해와 달과 별을 소재로 한 <달빛을 쫓는 사람>이다. 이른바 ‘부흐홀츠 트릴로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 세 권의 책들은 알 듯 말 듯 묘한 문장과 때때로 마음을 아릿하게 스치는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모리츠는 떠난다고 했다. 파울리네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파울리네를 사랑했으니까. 내가 떠나면, 모리츠가 말했다. 너희들은 아무 일 없는 듯 함께 지내면 돼. 그 말에 파울리네는 이렇게 물었지. 어째서? 그녀의 말에 난 가슴이 아렸고 아무런 동요 없이 귀 기울이는 건 오직 달님뿐이었다.’
- 미하엘 크뤼거의 시집이기도 한 <달빛을 쫓는 사람> 중에서


그렇다고 해서 그가 늘 다른 작가들의 힘을 빌리는 건 아니다. 스스로 ‘순간을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화가와 그의 믿기 어려운 여행담을 담은 그림책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은 글과 그림 모두 혼자서 탄생시켰다. 수줍음이 너무 많아서 눈이 펑펑 내릴 때만 숲 밖으로 나온다는 눈코끼리, 프랑스의 어느 작은 도시를 날아다니는 서커스단 자동차 등 얼핏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으로 그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를 입증해 보인다. ‘어떤 그림이든 비밀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통해 화가로서의 가치관을 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빈트 부흐홀츠 역시 본인을 ‘순간 수집가’라고 불렀다는 것.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가 세상 모든 화가와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초현실적이라 평하고 또 누군가는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평하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세계. 그러나 그곳에는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스스로 예술적 감성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조차 저도 모르게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는 그 무언가. 한 살 두 살 많아질수록 상상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드는 우리들, 한 번쯤은 물끄러미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누가 알까?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그 속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도 들려올지. ‘올해 나는 지난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이가 들었다’, ‘내가 바라본 그 별이 나를 이해한 것 같아. 우리의 언어가 통했던 거라구’ 같은 문장들이 우리 마음속에서도 회오리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모든 작품 ©Quint Buchholz
모든 사진 출처 - Curiator
메인 이미지 <Morning With Zebras>(2009)
크빈트 부흐홀츠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