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다는 건 일종의 ‘박탈’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중심에서, 주류에서, 대세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밀려 나가는 현상. 넘실거리던 활기가 점점 기력을 다하면 하나둘 외면당하다가, 이내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문화가 그렇고, 도시가 그렇고, 세대가 그렇다. 사실,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에 사라진 것들이라지만 당연한 것은 없다.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이야기들과 추억들이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청춘의 한 부분이었을 테니까. 여기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동시에 같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에 대하여.

 

1. 여전히 종이가 왜 좋습니까?
종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터뷰집 <종이의 신 이야기>

오다이라 가즈에 <종이의 신 이야기>

디지털화가 된 지 오랜 세상이다. 활자는 화면 속으로 들어갔고 보관되는 것보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이 더 많아졌다. 번거롭고 마모된다는 이유로 대체되고 사라져버린 종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정말, 모두 다시 반죽이 되어 똑같은 모습의 재생지나 흙이 되어버린 걸까?

<종이의 신 이야기>는 디자인 서적으로 분류되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종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해외여행에서 우연히 들렸던 빵집 포장지를 아직도 갖고 있거나, 작업을 하며 일정하게 도려낸 조각만 모으기도 하고, 어릴 적 먹었던 과자의 기름 종이가 좋아서 아직도 그 종이에만 스케치를 한다는 소소하고 사소한 이야기. 그래서 이 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해 종이에 대한 생각과 추억들을 마음껏 쏟아낸다. 화가, 아트디렉터, 교수, 북디자이너, 승려, 사진작가, 그래픽 디자이너, 탤런트, 수필가 등 직업은 다르지만 종이를 좋아하는 이유와 애정을 갖는 무게는 모두 비슷하다.

작가 오다이라 가즈에는 주로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에서 넘쳐나는 물건과 일, 가치에 대한 글을 써왔다. 그리고 이번 주제는 왜 종이인지에 대하여 이렇게 밝힌다.


“클릭 한 번으로 사라지지 않는, 덧쓰기도 할 수 없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느려터진 전달 도구. 그런 종이가 이 책의 주역이다. 10년 전에 한 번,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한번, 나는 작은 여행을 했다. 누구나 마음에 남아있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종이의 신’을 만나기 위해. 무심한, 사소한 종잇조각 안에도 ‘종이의 신’은 있다. 조용히,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쓰고, 찢고, 접어서.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종이는 신통하게도 살아있다.”

– 4쪽, <종이의 신 이야기>에서 발췌

‘종이의 신’ 발음은 일본에서 하느님과 같은 발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우연하고도 필연적으로 시작된 종이의 신 이야기는 읽다 보면 어느새 종이가 숨쉬고 살아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만큼 삶에서 추억할 수 있는 한 부분을 종이로 채운 사람들이 이야기가 생생하게 와닿기 때문이다. 만약 이 책이 술술 읽힌다면 아마 당신의 마음속에도 종이의 신이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 햇빛 어른거리던 추억의 공간을 환생시킨,
소설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우밍이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1961년, 한때 대만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던 대형쇼핑센터 중화상창(中華商場)은 31년의 화려했던 역사를 뒤로하고 1992년 10월 20일에 사라진다. 도시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세월이 흐르자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이유로 철거됐다.

1989년의 중화상창 Via jasonblog

대만의 소설가이자 교수, 예술가, 환경활동가인 저자 우밍이는 이렇게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중화상창을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육교와 골목들을 뛰어다니는 코흘리개 아이들과 그저 매일매일 벌어서 먹고살기 바빴던 부모님, 그리고 무엇이 소중한지 미처 모른 채 보냈던 일상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이 책 속 모든 것이 활기를 띤다. 그리고 육교 한 켠에서 마술을 보여주며 마술용품을 파는 미스터리한 마술사까지.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지는 10개의 단편의 중심에는 이 마술사가 있다. 그때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금 떠올리는 이야기들은 어렴풋한 기억에 쌓인 뿌연 먼지를 탈탈 털어내듯 펼쳐진다. 몽글몽글해지면서도 웃음이 나는 묘사들과 정내음이 가득한 글은 어느새 중화상창의 거리 한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가 버린다.


중화상창中華商場은 총 여덟 동이었고 각각의 동은 충忠, 효孝, 인仁, 애愛, 신信, 의義, 화和, 평平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우리 집은 애동과 신동 사이에 있었다. 애동과 신동 사이에도 육교가 있었고, 애동과 인동 사이에도 육교가 있었다. 나는 애동과 신동 사이에 있는 육교를 좋아했다. 그 육교가 더 길었기 때문이다. 육교의 다른 쪽 끝이 번화가인 시먼딩西門町과 연결되어 있어 육교 위에 온갖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스크림, 아동복, 샤오빙燒餅, 와코루 속옷, 금붕어, 거북이, 자라, 심지어 ‘바다스님’이라는 이름의 파란 게를 파는 노점상도 있었다….

– 10쪽,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에서 발췌

다른 나라의 이야기임에도 또렷한 기억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또한 비슷한 추억을 지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되면 과거의 기억은 잊은 채 살아가기 마련이고, 문득 그리워졌을 땐 이미 저만치 멀어져 버린 시절. 돌아갈 수 없지만 분명 존재했던 시절이다. 저마다 뛰어놀았던 그 길은 우리의 서랍 속에도 있다. 노이즈가 잔뜩 낀 빛바랜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당신도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에서 코끼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안녕! 중화상창>, 중화상창 철거 영상

2018년 4월에는 대만의 한 방송 매체에서 중화상창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소설의 발간을 기념하고 다시금 추억하는 기획을 테마로 옛 중화상창 사진 모으기 프로젝트를 열기도 했다.

중화상창을 추억하는 사진 모으기 프로젝트 소개영상

 

3. 과거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여행기 <다방기행문>

유성용 <다방기행문>

‘쌍화차에 노른자 동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 세대마다 떠올리는 그림은 분명 많이 다를 것이다. 아니, 아예 다를지도 모른다.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커피잔에 노랗게 올려진 노른자를 상상하는 것이 전부인 이들과 그 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까지 떠올리는 이들의 기억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이미 많이 사라진 다방을 다시금 떠올리고 더 자취를 감춰 버리기 전에 사진기를 들고 길을 떠났다.

작가는 전국을 돌며 아직 남아있는 다방을 찾기 위해 스쿠터에 몸을 싣는다. 어쩌면 싣는다는 표현마저 과하다고 느껴질 만큼 스쿠터는 작고, 소박한 이동 수단이다. 하지만 이내 작가의 선택이 옮았음을 깨닫게 된다. 자동차처럼 거대한 몸집으로는 비집고 찾아갈 수도 없는 곳들, 좁아서 부대껴 살고, 그래서 사람 냄새가 나는 곳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려면 스쿠터가 제격이니까. 작가는 쭈뼛쭈뼛 다방의 커피를 주문해본다. 손때가 묻어 있는 재떨이와 커다란 숫자의 달력, 이끼가 낀 어항, 현란한 벽지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실 이 기행문에는 다방보다 이발소, 여관 등 다른 곳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꼭 골목 어귀에서 딴 길로 새어버리는 것처럼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와 주관적 경험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복고가 물씬 느껴지는 향수를 대놓고 소비하기보다 이방인으로서 느낀 감정들을 덤덤히 기록해 놓았을 뿐이다. 다방을 보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록하는 형식과는 많이 다르기에 예상했던 내용과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꼭 다방의 수많은 모습 중 하나의 면(面)을 비추는 것처럼 보인다.

빗나간 허영심과 여성이 다방 ‘레지’로 불리며 잘못된 소비의 장으로 전락하기도 했던, 그리고 그런 것들이 공공연하게 허용되던 시절. 퇴폐적이고 쾌적하지 않았던 일면들로 쇠락해버린 다방이지만 분명 기다림과 설렘의 공기가 가득했던 곳. 작가의 여과 없는 기록은 여러 가지 모습을 모두 가진 곳이 다방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리움보다는 씁쓸함과 연민에 가까운 감정으로 떠올리게 되는 것들. 종종 궁금해지지만 더 이상 안부를 묻지 않는 곳. 그런 곳들을 담은 기행문이다.

 

Writer

그림으로 숨 쉬고 맛있는 음악을 찾아 먹는 디자이너입니다. 작품보다 액자, 메인보다 B컷, 본편보다는 메이킹 필름에 열광합니다. 환호 섞인 풍경을 좋아해 항상 공연장 마지막 열에 서며, 동경하는 것들에게서 받는 주체 못 할 무언가를 환기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