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보면 기술의 발전이 있다.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바뀌고, 흑백영화가 컬러영화로 바뀌면서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이젠 3D부터 아이맥스까지 다양한 영상기술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화려함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시대에도 흑백영화는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작년 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뒤로 각종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대표적인 예다. 삶의 어떤 장면은 색을 덜어냈을 때 극대화된다. 그런 순간 때문에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지금도 흑백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있는 게 아닐까. 색이 넘쳐나는 시대에 등장한, 2010년 이후의 흑백영화들을 살펴보자.

 

<아티스트>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스타 ‘조지’(장 뒤자르댕). 조지는 우연히 팬들 사이에서 신인 배우 ‘페피’(베레니스 베조)와 부딪친다. 페피는 엑스트라로 참여한 영화 촬영장에서 조지와 재회하고, 조지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간다. 시간이 지나 유성영화가 등장하지만 조지는 무성영화만을 고집하고, 페피는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으며 영화계의 아이콘이 되어간다.

<아티스트>는 제8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았는데, 제1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날개>(1927) 이후로 무성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은 자신의 데뷔작인 <OSS 117: 카이로 - 스파이의 둥지>(2006)에서 호흡을 맞춘 장 뒤자르댕, 베레니스 베조와 다시 호흡을 맞췄고, 장 뒤자르댕은 <아티스트>로 칸 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티스트> 트레일러

<아티스트>는 흑백 무성영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고전 영화보다 유튜브가 익숙한 현시대의 관객들에게도, 대사 대신 몸짓과 표정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방식은 흥미롭게 느껴질 만하다. 조지와 페피의 관계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다. 유성영화의 아이콘 페피가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조지를 보며 꿈을 키운 것처럼, 유성영화들의 뿌리에는 무성영화가 있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영화들의 근원을 가장 낭만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아티스트>의 가장 큰 미덕이다.

 

 

<네브래스카>

‘우디’(브루스 던)는 잡지사의 광고 전단지를 보며 자신이 백만 달러의 상금을 받게 됐다고 생각하고, 상금 수령을 위해 네브래스카로 가길 원한다. 우디의 아들 ‘데이비드’(윌 포트)는 우디가 전단지를 잘못 해석했다는 걸 알지만 무기력하게 지내는 우디를 위해 동행한다. 데이비드는 여행 도중에 자신이 어릴 적 살던 마을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우디에 대해 모르던 사실들을 듣게 된다.

<네브래스카>는 흑백의 로드무비다. 아내가 죽은 뒤 딸이 무능한 예비 신랑과 결혼하는 걸 막으려는 ‘슈미트’(잭 니콜슨)의 여정을 담은 <어바웃 슈미트>(2002), 와인 애호가 ‘마일즈’(폴 지아마티)가 친구와 총각파티 겸 와인 농장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이드웨이>(2004) 등 알렉산더 페인 감독은 로드무비를 통해 삶을 보여주는 데 능하다. 그의 작품은 위트로 가득한데,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을 곱씹다 보면 삶의 단맛부터 짠맛까지 고루 느껴진다.

<네브래스카> 트레일러

우디는 은퇴 후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년의 삶을 살고 있다. 데이비드는 아버지와 여행하면서 뭔가를 얻기보다 잊었던 걸 되찾는다. 자라면서 사라진 가족 간의 애틋함, 세월에 잊혀 가는 아버지의 상처 같은 것들. 우디가 광고 전단지에 현혹되어서 며칠씩이나 걸리는 도시로 이동하는 걸 보며 바보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이라는 말로 그 어떤 낭만도 없이 타인의 꿈을 비웃는 이보다, 허황된 듯 보이는 꿈이라도 그걸 희망으로 삼는 삶이 훨씬 숭고하다. 흑백영화이지만 우디가 전진하는 길목마다 다양한 색을 본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결국 그가 품은 꿈 때문이다.

 

<이다>

고아로 수녀원에서 자란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수녀가 되기 위한 서원식을 앞두고 그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아가타 쿠레샤)를 만난다. 안나는 완다를 통해 자신이 유대인이며 본명이 ‘이다’라는 걸 알게 된다. 안나는 자신의 부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하고, 완다와 함께 부모의 흔적을 쫓는다.

<이다>는 제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고, 촬영상 후보에도 올랐을 만큼 인상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인물을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에 두고, 인물의 신체 일부만 보여주는 프레임 구성이 돋보인다. 마치 자기 삶의 일부를 모른 채, 진실과 거리를 둔 채 외진 수도원에서 살던 이다를 닮은 화면구성이다.

<이다> 트레일러

수녀가 되려는 이다와 자유분방한 완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동행은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유대인 학살의 흔적과 예술의 태동이 공존하는 60년대의 폴란드 같다. 완다는 이다의 방문을 계기로 자신의 과거를 들춰보고, 이다는 전혀 예상도 못 한 자신의 역사를 발견한다. 영화가 내내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부분을 만들어서 신경 쓰이게 만든 이유는, 단단한 프레임 같은 나의 세계 밖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다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이다는 이전과 같은 수녀복을 입고 있음에도 아주 많이 달라 보인다.

 

<동주>

일제강점기, 동갑내기 사촌인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는 한집에서 자란다. 윤동주는 시인을 꿈꾸고,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움직인다. 지향점은 조금 다를지라도, 두 사람은 함께 대학 생활을 하고 일본 유학을 간다. 친구로서 서로 아끼고 때로 다투기도 하는 가운데, 시대는 점점 둘을 압박한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흑백영화로 만든 이유로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첫 번째는 5억 정도의 저예산 영화인데 시대물이라 컬러로 찍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두 번째는 흑백사진으로 익숙한 윤동주와 송몽규의 모습을 담백하고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흑백화면이 어두운 시대를 보여주는 듯했고, 시대의 어둠을 머금은 윤동주의 시는 흑백화면 위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동주> 예고편

<동주>에서 윤동주의 시만큼 인상적인 건 송몽규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한 시대에 한집에서 태어나서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마음의 방향은 묘하게 달랐고,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다. 윤동주가 시를 아꼈다면, 송몽규는 시를 쓰는 윤동주를 아꼈다. 자신은 위험한 선택을 하면서도, 윤동주에게는 함께하자는 말 대신 시를 쓰라고 한다. 윤동주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에 한 선택이었을 거다. 윤동주는 시로 세상을 아꼈고, 송몽규는 그런 윤동주의 마음을 아꼈다. 그러므로 <동주>는 결국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아끼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