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모두에게 보호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때로는 아무도 아이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된다. 영문도 모른 채 홀로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이들은, 세상의 아름다움 대신 부조리함에 대해 먼저 배운다. 아이들의 순수와 반짝이는 미소는 지독한 세상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지고 짓밟힌다. 지금 소개할 세 편의 영화는 오롯이 아이들의 시선에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관해 이야기한다. 차가운 현실의 벽을 마주하며, 아이들은 마침내 웃을 수 있을까.

* 아랫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버나움>

<가버나움>의 주인공은 레바논 빈민촌에 사는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이다. 어느 날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슈퍼 주인에게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날로 집을 떠난다. 자인은 우연히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을 만나 함께 살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잡혀 들어간다. 라힐의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와 단둘이 남게 된 자인은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좌절한다. 결국 자인은 동네로 돌아와 부모를 고소하기로 한다. ‘자신을 태어나게 했다는 죄’로 말이다.

<가버나움> 스틸컷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근처 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한때 신의 축복이 있었지만 지금은 폐허가 된 땅을 상징한다. 영화의 배경인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는 더 이상의 기적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이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가버나움>은 한 아이의 시선을 통해 폐허가 된 베이루트 사회를 고발한다. 무책임한 부모, 아동착취, 난민, 매매혼, 마약 등 여러 이슈를 짚어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질문을 던진다. “자인의 고통은 정말 부모로부터 시작된 것인가?” 관객들은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 아이들의 얼굴만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영화가 이룬 일종의 쾌거다.

<가버나움> 트레일러

<가버나움>의 배우들은 모두 연기를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실제 난민들이다. 그들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솔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영화 밖에서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한다. 영화의 제작진은 세상 어딘가에 있을 수많은 자인, 라힐, 요나스를 지속적으로 돕기 위해 ‘가버나움’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 아이들의 고통을 정확히 바라보려는 노력,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첫걸음일 테니까.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전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 엄마를 기다리는 네 명의 아이들의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영화에서 다시 한번 감정적 연출을 최대한 배제한 채 아이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데만 오롯이 집중한다.

<아무도 모른다> 스틸컷

남겨진 네 명의 아이 중 단연코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다.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어야 했던 열두 살 소년을 연기한 그는, 데뷔작인 이 영화를 통해 제57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아키라는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지만, 돈이 떨어지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된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아키라와 동생들이 마주한 현실을 차갑게 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아이들의 얼굴에 시종일관 따스한 햇볕을 비추며 그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감싸 안는다.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 웃음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반짝이는 화면에 더욱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다.

<아무도 모른다> 트레일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속에서 아이들의 엄마를 악인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관객들이 단죄의 대상을 계속 생각하게 함으로써, 영화 속 이야기를 자신의 일상으로 끌고 올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진짜 현실을 끊임없이 말해준다. 영화의 제목 그대로 “사람들은 아이들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사회는 그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할 뿐이었다고” 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의 자서전에서 “아이들은 같은 시간 축에 있지만, 수평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사회)를 비평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의 말을 훌륭하게 증명하는 영화다. 함께 보고, 함께 이야기해보자.

 

<자전거 탄 소년>

<자전거 탄 소년>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11살 소년 ‘시릴’(토마 도레)의 이야기다. 다르덴 형제(장-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제6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영화는 주인공 시릴이 우연히 ‘사만다’(세실 드 프랑스)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한다. 첫 만남부터 시릴의 아픔에 마음이 간 사만다는, 주말 위탁모가 되어 그를 사랑으로 보살피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아직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 남아있는 시릴은 동네 갱 두목 웨스를 아버지처럼 따르게 되고, 이는 결국 강도질로까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만다는 큰 상처를 입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릴을 놓지 않는다.

<자전거 탄 소년> 스틸컷

영화를 보다 보면 사만다라는 인물이 마치 이상적인 구원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낯선 아이(타인)에게 맹목적인 관심과 애정을 줄 수 있는 어른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낯선 관계가 만드는 놀라운 변화들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위태롭게 질주하던 시릴은 웃으며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고, 진정으로 자신이 향해야 할 곳을 깨닫게 된다. 특히 사만다에게 배운 이해와 용서를 타인에게 똑같이 보여주는 시릴의 모습은, 영화에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이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자전거 탄 소년> 트레일러

사만다는 부모가 가져야 할 책임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연대’를 대변하는 존재다. 누군가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웃을 수 있을까?”, 이 어렵고도 힘든 질문에 사만다는 대답하고 있다. 아이들의 눈물에 책임감을 느끼는 어른이, 고통받는 이들을 지켜주는 사회가, 아이들에 곁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마침내 활짝 웃을 수 있을 거라고.

 

 

Writer

빛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 가끔 글을 쓰고, 아주 가끔 영상을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