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제도에 반기를 들고,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플랫폼이 있다. ‘만선’이 바로 그곳이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투박하고 귀여운 매미 모양의 로고 옆, ‘晩蟬(만선)’이라는 한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지만 함께 모여 노래하면, 한 계절을 대표할 만큼의 커다란 존재감을 띠는 매미처럼, 만선에는 함께 모여 음악의 리그를 형성하는 다양한 뮤지션들이 있다. 세상에 다시없는 음악들을 선보이는 만선의 뮤지션들을 소개한다.
쾅프로그램

쾅프로그램의 음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밴드의 음악을 듣고 있자면 무엇이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형용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형용해보고 싶은 단어와 문장들이 난무하지만, 결국 무어라고 정의하지 못한 채 멍하니 음악을 듣게 된다. 오히려 이 ‘정의할 수 없음’, 비결정적인 것이 이 음악의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최태현은 내가 아는 가장 커다란 소리를 만드는 음악가다. 이 음반 역시 기괴하지만 섬세하고 커다랗게 뒤틀린 소리와 리듬으로 가득한, 지금 들을 수 있는 가장 재미있고 날 선 결과물이다. 이 소리들이 감은 눈 저편에서 보았던 것들을 그린 그림인지, 이쪽 편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그림인지. 어느 쪽이든 틀린 답은 아닐 것 같다.”
- 조월
모임 별과 우리는속옷도생겼고여자도늘었다네에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 조월이 쾅프로그램에 대해 써놓은 문장들은 이 비결정적인 음악을 그나마 ‘이 세상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어느 쪽이든 틀린 답은 아닐 만한’ 음악을 듣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유기농맥주

이들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복합문화공간 무대륙에서 진행했던 한 공연에서였다. ‘멤버들이 맥주를 참 좋아하나 봐’라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들의 음악은 그렇게 가벼이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유기농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원초적이며, 폭발적인 사운드는 무료하게 축 처져 있던 귀를 번쩍 뜨이게 해주었다.
어떤 이유든지,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음악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 사운드가 얼굴을 찌푸리게 하든, 숨을 헐떡이게 하든. 굳이 영상으로 따지자면 아름답고 넓은 Full HD보다는, 지직거리고 투박한 4:4 사이즈의 흑백 영상이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할까. 전위적인 선율 안에는 음악(정확하게 말하자면 록)에 대한 꽤 단단한 고집과 클래식함마저 자리 잡고 있다. 유기농처럼 원초적이고, 맥주처럼 톡 쏘며 싸하게 피를 돌게 하는 ‘유기농맥주’의 음악. 트림을 끄윽 하며 세상의 답답함을 내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음악을 추천하고 싶다.
줄리아 하트

줄리아 하트는 오래전부터, 그리고 참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음악을 만들어 왔다. 이 밴드의 음악을 듣고 있자면 꽤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발랄하고 통통 튀는 선율에 비해 가사가 퍽 슬프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음악은 복잡다단한 기분을 설명하는 방식이 굳이 우울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항상 밝은 노래만 만든 것은 아니다. 2006년에 발매된 <당신은 울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다소 우울한 면을 많이 띠고 있는데, 이 음반을 혼자서 제작한 정바비는 앨범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 상처를 입으면 그 고통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다른 아픔을 자신에게 주기 위해 상처 주변을 일부러 손톱으로 꼬집어 피멍이 생길 때가 있었습니다. 줄리아 하트의 3집은 그런 모질고 악에 받친 손톱자국들, 서러운 피멍들로 가득 찬 앨범이 되었습니다.”
여러 감정과 삶을 이야기하는 줄리아 하트의 음악은 듣는 맛이 있다. 곱씹고 또 곱씹고 싶은 음악들이 한가득이다. 이들이 낸 많은 음악을 소개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니, 직접 찾아 들으며 ‘듣는 맛’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헬리비전

헬리비전의 공연을 처음 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함께했던 음악 동료에게 악을 쓰듯 말했던 첫 감상평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음악이 뼈를 때려! 지금도 뼈 맞았어!”
마디마디를 파고드는 드럼 비트와 그와 동시에 메꾸는 장장한 기타 사운드들. 말 그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광경이었다.
헬리비전의 음악을 (조금 식상하지만) 색깔로 표현하자면 강렬한 붉음이 떠오르는데, 피 튀기는 전장을 방불케 하면서도 격정적인 삶의 태동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러닉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삶과 죽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음악인 것이다. 헬리비전의 음악을 온라인으로 소개하면서도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꼭 한번 현장에서, 그들의 음악을 직접 ‘만나보길’ 권한다. 펄떡이는 삶과 죽음의 현장을 마주해보시길.
만선에는 이번에 소개한 네 팀 말고도 개성 있고 다양한 뮤지션들의 음악들이 소개되어 있으니, 이곳에서 ‘이 세상에 다시없는’ 즐거움을 누려보시길 바란다. 다음엔 어떤 뮤지션이 이 플랫폼에 이름을 올릴지, 궁금해하고 기대하며 홈페이지를 들락거리게 될지도 모르니.
만선 홈페이지
만선 유튜브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