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달린 기다란 물체를 흔들어 그 속을 들여다본다. 가만히 쳐다보다 문득, 현실에서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오색찬란의 무늬가 공허한 내면을 비집고 들어온다. 어지러이 변하는 움직임에 홀려버린 마음은 그 형체를 소유하고 싶은 충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가 봤던 가장 아름다웠던 모양, 인생의 화려했던 순간은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만화경을 흔들어 빛나는 정점을 향한다.

출처 - Unsplash 

어린 시절 갖고 놀거나 한 번쯤 만들어봤을 만화경(萬華鏡, kaleidoscope)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영국의 물리학자가 거울에 빛이 반사하는 원리를 탐구하고자 고안했던 것이지만 현재 모든 사람을 홀리는 놀이 기구이자 동적인 예술 작품이 되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만화경의 무늬는 거울의 배치에 따른 반사 각도와 물체의 움직임 그리고 대칭되는 상의 개수 등 수많은 요인에 의해 달라진다. 이번 글에서는 만화경이 펼치는 절정의 색채미와 무한한 공간감을 활용하여, 다양한 감정선을 전달하는 해외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한다.

 

CHVRCHES ‘Gun’

CHVRCHES ‘Gun’ (directed by Pen$acola)

칼날처럼 매서운 일렉트로니카 비트, 그 위에 놓인 보컬은 연약하게 들릴지 몰라도 가사를 들어보면 촌철살인이 따로 없다. 스코틀랜드 출신 신스팝 밴드 처치스(CHVRCHES)는 ‘사람들이 춤추면서 지적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지향한다. 그중 데뷔 앨범 수록곡인 ‘Gun’은 업비트로 경쾌한 발놀림의 신스 멜로디와 캐치한 후렴구를 정면에 세워두고 있지만 정작 가사는 자신을 배반한 대상을 향해 총을 겨누는 내용이다. 80~90년대 신스 사운드만큼이나, 뮤직비디오는 음파의 진동과 빠른 움직임 표현을 위해 전통적인 특수 효과를 적극 활용했다. 만화경 효과는 곡의 중후반부에서 볼 수 있는데, 화자가 냉소적인 자세에서 현재 상황을 조각조각 내서 파헤치고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려는 모습으로 비친다.

 

OK Go ‘All Is Not Lost’

OK Go ‘All Is Not Lost’ (directed by OK Go, Pilobolus and Trish Sie)

진중하게 다가오는 기타와 포근하게 울려 퍼지는 신스 사운드, 그 위에서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 보컬이 이내 후렴구에 다다르자 밝게 타오른다. 미국 시카고 출신 인디밴드 오케이 고(OK Go)는 저예산의 창의적인 뮤직비디오로 명성을 얻어 현재는 여러 스폰서와 함께 독창성을 무한히 발휘하고 있다. 밴드는 곡 ‘All Is Not Lost’를 통해 누군가는 희망이 없다고 하지만, 나쁜 일 뒤엔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며 고무적인 메시지를 더한다. 이어서 뮤직비디오에서는 필로볼러스 무용단과 함께 특수 효과 없이 안무만으로 재현했다. 하나하나 정해진 기계적인 움직임에도, 우아한 춤 선과 멤버 각자의 개성이 더해지니 인간미가 한껏 살아났다. 후반부로 가면서 미학적인 영상미가 배가되니 주의 깊게 지켜보자.

 

JAY-Z & Kanye West ‘Ni**as in Paris’

JAY-Z & Kanye West ‘Ni**as in Paris’ (directed by Kanye West)
주의: 광과민성 발작을 유발하는 요소가 포함된 영상이므로 시청에 주의를 요함

몽롱하게 전진하는 신스 리프와 싸늘하게 뱉어내는 드럼 비트를 밟아가며 던지는 재치가 여간 흥미롭다. 래퍼 제이지(JAY-Z)와 칸예 웨스트(Kanye West)가 협업한 프로젝트 앨범 <Watch the Throne>의 수록곡, ‘Ni**as in Paris’는 과거 역사상 하급 계층으로 멸시받았던 유색인이 지금은 패션과 예술의 중심 파리에서 위엄을 떨친다는 자기 과시 트랙이다. 뮤직비디오는 두 래퍼의 LA에서 선보인 걸출한 래핑을 라이브를 사이키델릭하게 표현했다. 만화경, 화면 분할 그리고 스트로보 효과를 적용하고 파리와 야생의 모습을 교차하며 역동적인 전개를 강조하고 있다. 칸예 웨스트의 현대 예술에 대한 조예, 미적 감각과 개성, 높은 음악적 완성도가 모두 투영된 작품이다.

 

The Correspondents ‘Fear & Delight’

The Correspondents ‘Fear & Delight’ (directed by Naren Wilks) 

재지한 스윙 넘버와 디스토션의 조화가 경이로운 데다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 곡을 이끄는 보컬은 극적이다. 영국 런던 기반의 일렉트로 스윙 밴드 코레스펀던츠(The Correspondents) 역시 재기발랄하고 독창적인 뮤직비디오로 크게 호평을 받는 뮤지션이다. 곡 ‘Fear & Delight’는 매혹적이지만 다가가기엔 위험한 상대를 예찬하는 가운데 빠르게 전개되는 것이 포인트다. 뮤직비디오는 무성영화 풍으로, 특별한 그래픽 기술 없이 카메라만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만화경 효과를 담아냈다. 감독은 만화경이 예각의 프레임에서 효과를 발현하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원형 프레임에서 16개의 DSLR 카메라를 세워 더욱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메이킹 영상 참고).

 

Minus the Bear ‘Last Kiss’

Minus the Bear ‘Last Kiss’ (directed by Dan Huiting) 

어지러이 울리는 기타 리프에도 향수를 자극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상당히 구슬프다. 덕분에 곡을 지배하던 흐릿한 잔상도 영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시애틀 출신 인디 록 밴드 마이너스 더 베어(Minus the Bear)는 복잡한 리듬감의 매쓰록(math rock)과 프로그레시브 넘버를 꾸준히 선보이는 그룹이다. 곡 ‘Last Kiss’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이별의 키스로 뇌리에 박힌 충격을 노래하며, 뮤직비디오는 현대 도시의 풍경과 파스텔톤의 스크린에서 노래하는 밴드의 모습이 엇갈리는 것을 표현했다. 감독은 곡을 듣고 ‘밴드가 초현실적이며 기하학적인 패턴(만화경)이 덧붙여진 새로운 디지털 세상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를 구현하고 자연스러움을 살리고자 몇 가지 그래픽 효과를 대신해 실제 플라스틱 프리즘과 유리 조각을 활용했다.

 

Coldplay ‘Birds’

Coldplay ‘Birds’ (directed by Marcus Haney) 

긴박한 형세의 비트감과 농롱하게 빛나는 기타 리프로 한껏 분위기를 띄우고, 점차 고조되는 분위기를 통해 마치 새처럼 하늘을 비상하는 효과를 드리웠다. 영국을 대표하는 팝 록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는 뉴웨이브 트랙 ‘Birds’의 가사에서 창망한 하늘을 가볍게 나는 새를 통해, 사랑의 영원함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캘리포니아의 샐베이션 마운틴과 밴드의 모습을 담은 사이키델릭한 영상에 복고풍 효과와 만화경을 빠르게 교차하면서 질주감을 표현했다. 콜드플레이가 만들어낸 만화경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질 용기를 건네는 희망의 최면이다.

 

출처 - Wikipedia

매번 바뀌는 만화경처럼 누군가의 삶도 정해진 결과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미래를 새로 가꾸기에도 모자란 지금, 현재에 솔직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에 있던 최고의 순간을 재현하고자 노력해봐도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 차라리 바로 이때 만화경을 다시 흔들어 또 다른 최고의 무늬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Writer

실용적인 덕질을 지향하는, 날개도 그림자도 없는 꿈을 꾸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