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시간을 뜻하는 ‘스크린 타임’과 영화 밖의 시간인 ‘리얼 타임’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른다. 영화 대부분은 2시간 내외의 러닝타임 속에 리얼타임인 2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시간을 담고 있다. 짧게는 하루나 며칠, 길게는 십수 년이나 수십 년까지.

허나 부분이든 전체든 영화 속 시간이 현실과 거의 동일하게 흘러가는 리얼타임 영화도 있다. 이 같은 의도적 각본과 연출을 통해 관객은 사건의 호흡을 끊김 없이 경험하고, 더욱더 생생하고 긴장감 있게 영화에 몰입한다. 이처럼 현실과 거의 동일한 속도로 흐르는 영화 속 순간들을 모아봤다.

 

<롤라 런>(1998) – 20분

남자친구를 살리는 데 주어진 급박한 시간

제목 그대로 주인공 ‘롤라’(프란카 포텐테)는 쉬지 않고 달린다. 암흑가 거래에 연루된 순진한 남자친구 ‘마니’(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가 조직의 보스에게 가져가야 할 돈 10만 마르크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약속 시각까지 돈을 구하지 못하면 남자친구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롤라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0분. 그는 은행 간부인 아버지에게 돈을 구하려고 하고, 마니는 구멍가게를 털려고 한다.

<롤라 런>은 갖가지 화려한 장치들로 당시 비평가들과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급박한 줄거리와 달리는 롤라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점프 컷과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했고, 테크노 음악과 애니메이션 장면을 활용해 작품만의 독특한 스타일도 구축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20분이라는 제한 시간을 현실의 시간과 똑같이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20분 안에 미션을 해결해야만 하는 주인공의 절박한 순간을 동등한 시간 개념으로 체험하게 된다.

<롤라 런> 롤라가 달리는 장면

 

<비포 선셋>(2004) - 1시간

짧은 재회의 아쉬운 시간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자신의 작품 속에 늘 생생한 현실의 시간을 녹여내려 고민한다. <보이후드>(2014)의 경우, 그가 무려 12년에 걸쳐 촬영함으로써 아역배우가 성장하고, 성인배우가 점차 늙어가는 실제 세월을 영화 속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유명세를 만든 ‘비포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비포 선라이즈>(1995)부터 <비포 미드나잇>(2013)까지 이 시리즈는 매번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함께하는 두 주인공의 쉬지 않는 대화를 현실과 매우 비슷한 속도로 다룬다.

이중 두 번째 작품인 <비포 선셋>(2004)은 특히나 짧은 시간을 담고 있다. 전작에서 해 뜨기 전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20대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가, 9년이 지나 다시 파리에서 만나 해 단 1시간가량을 함께 하는 내용이기 때문. 배우들이 해가 질 무렵 짧은 시간대의 야외 촬영지를 걸으며 이야기가 흘러가고, 촬영을 위해 주어진 기간은 15일뿐이었기에, 영화는 하루에 단 몇 시간씩만 촬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면과 시간이 최대한 조각나지 않은 채 실시간 롱테이크, 롱숏으로 영화를 촬영함으로써, 작품은 수없이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와 감정선을 유려하고 현실감 있게 전달할 수 있었다.

<비포 선셋> 중 노틀담 성당 앞 제시와 셀린 대화 장면

 

<로크>(2014) - 1시간 25분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고통의 시간

<로크>는 무척 단순한 콘셉트로 촬영된 영화다. 1시간 25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 몇 초를 제외하고는 오직 고속도로 위 자동차 안에서, 주인공 ‘로크’(톰 하디)의 전화 통화로만 줄거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건설 현장 감독 로크. 그는 항상 성실한 자세와 완벽한 일 처리로 지금의 성공적인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이날 따라 어딘가 수상한 모습을 보인다. 회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갑자기 자리를 떠나 런던으로 향한 것이다.

이어지는 로크의 전화 통화를 통해 사연의 윤곽이 드러난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책임을 치르고자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대가가 절대 작지 않았던 것인지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완벽하게 지켜왔던 직장과 가정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그가 의지할 것은 오직 전화 통화뿐. 지독한 감기와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그는 운전과 통화를 절대 멈추지 못한다. 영화 속 로크의 인고와 노력의 시간은 현실과 같은 템포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한창 고군분투 중인 저마다의 인생 단면처럼 말이다.

<로크> 로크의 독백과 통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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