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풍속도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민족 대명절 설날에 귀성객으로 붐비는 도로의 풍경은 여전하다. 갇힌 차 안에서 노래를 듣는다. 물론,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 아버지는 요즘 자주 들으신다는 장윤정의 ‘초혼’을 틀었다. “따라가면 만날 수 있나 멀고 먼 세상 끝까지 그대라면 어디라도 난 그저 행복할 테니”라는 가사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자꾸 듣게 된다고 하셨다. 문득, 이 도로를 가득 채운 다른 차들은 무슨 노래를 듣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들이 듣고 있는 노래를 차 위에 악보로 그려 놓으면 장관이 되겠다 생각했다. 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에 의해 길 위에 흩뿌려진 노래들로 만든 음악 지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몇 권의 책이 떠올랐다.

 

<사운드맵>

이영미, 이진성, 박재철 ❙ 라임북 ❙ 2015.11.10

먼저 음악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가자. 그것은 단순히 당신을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만들고, 듣고 싶은 음악이 많아지는 즐거움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 시대의 풍경,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즐거움도 수반한다. 음악을 읽는 궁극의 기쁨은 음악과 사람을 함께 읽는 것이다. 오늘 함께 읽을 세 권의 책은 더더욱 그렇다. 자 그럼 첫 번째 책, <사운드맵>을 펼쳐보자. 이 책 속에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도시, 서울의 음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퀴즈로 시작해 보자. 다음은 노래의 가사들이다. 공통으로 노래하고 있는 지역은?

1.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그 사람은 모를 거야 모르실 거야
2.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3. 오빤 강남 스타일
4. 겉으로 빛나면 뭐해 속은 텅 비어있는데

위 노래들은 모두 강남을 배경으로 한 노래들이다. (1. ‘밤비 내리는 영동교’ / 2. ‘제3한강교’ / 3. ‘강남스타일’ / 4. ‘압구정 4번출구’) 제3한강교는 지금의 한남대교를 뜻하며 영동은 강남의 옛 이름이다. 고층 건물로 가득한 부의 도시 강남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배추만 무성히 자라던 배추밭이었다. 당시 한강 이남 쪽에서 발달한 지역은 영등포뿐이었고 영등포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다 해서 영동 지역으로 불릴 정도로 당시의 강남은 기준이 되지 못하는, 서울의 변두리 배추밭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이 배추밭은 화려한 도시로 발전하게 된 걸까? 1968년 북한에서 간첩이 쳐들어왔던 1·21 사태의 여파, 경부고속도로 준공 등 안보, 정치, 경제 복합적 요인들로 인해 한강 다리들이 놓였으며, 그중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제3 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이다. 이는 강남이라는 거대 도시 탄생의 신호탄이 됐다.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는 불과 50여 년 후의 도시 풍경을 이렇게 많이도 바꿔 놓았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위 가사를 다시 한번 보면 도시의 변화를 더 자세히 느낄 수 있다. 낭만과 꿈이 가득한 곳에서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가 물질적 가치로만 치장하는 곳까지. 한 지역에 대한 노래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써졌다.

이시스터즈 ‘서울의 아가씨’ - 김남석 작사, 박선길 작곡
충무로-명동 일대는 해방 이후 유행의 산실이자 문화와 예술의 집결지였다. 당시의 ‘서울 멋쟁이'들을 지칭하는 노래들은 대부분 이 지역을 염두에 두고 쓰인 노래다.

이렇듯 이 책은 서울의 각 지역(북촌 종로와 남촌 명동, 이태원과 대학로, 홍대, 서민의 삶을 대변하는 1호선의 도시들까지)의 역사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지역성들을 음악을 통해 소개하며 서울의 지도를 음악으로 그린, 흥미로운 사운드맵(sound map)이다.

 

<부산의 대중음악>

김종욱 ❙ 호밀밭 ❙ 2015.12.28

이제 저 남쪽 끝으로 가보자. 한국 제1의 항구 도시 부산. 현재는 영화로 더 유명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중음악사에서 부산이라는 도시는 꽤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다. 한국 최초의 지역 음반회사가 설립된 곳이기도 하고 수많은 대중음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대중음악 연구가였던 저자가 평생을 모아온 부산 음악에 대한 모든 자료를 엮어 만든 이 책은 1930~1960년대 노래들이 주를 이룬다. <사운드맵>이 도시의 이야기와 노래의 이야기를 비등하게 실었다면, 이 책은 부산을 노래한 곡들의 가사를 주로 실었고 노래와 가수에 대한 소개를 최소화했다. 노랫말에는 시절이 실린다. 흘러간 노래 가사들을 쭉 읽고 있으면 그 시절의 언어들, 시대 상황들이 읽힌다. 

후랑크백 ‘울며 헤진 부산항’ (1961) - 반야월 작사, 이인권 작곡.
지리적, 시대적 특성 때문에 부산의 옛 음악들은 항구의 이별을 노래한 통한의 곡들이 많다

몇 해 전, 부산에 간 적이 있다. 부산역에 내려 마주한 풍경은 아주 실망스러웠다. 편의점, 빵집, 아이스크림 가게, 핸드폰 가게 등 모두 서울에서 질리도록 봤던 간판들이 똑같이 즐비해 있었다. 부산역이라는 간판만 지운다면 여기가 서울인지 부산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도시의 모습이 저마다의 지역적 특성을 띠고 개성을 가지고 있던 옛 시절에는 노래가 될 풍경들이 많았을 것이다.

도시의 풍경이 힘을 가진 대기업의 자본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세월의 흔적들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라면,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이 되고 노래가 될 풍경들이 많아질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져 버리는 유행가가 아니라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그래서 한 곡을 들어도 과거의 풍경들을 그림처럼 그려볼 수 있는 노래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노래처럼.

 

<로큰롤의 유산을 찾아서>

조현진 ❙ 안나푸르나 ❙ 2015.12.21

자, 이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저 멀리 미국 땅을 밟아본다. 즉, 로큰롤의 역사를 두 발로 밟아보자는 얘기다. 우리는 종종 시작을 잊는다. 너무 오래전에 생겨난 어떤 것들, 이제는 우리 일상에 흔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시작을 물으면 명확한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음악 역시 그렇다. 로큰롤은 어디서 생겨난 걸까? 최초의 로큰롤 음악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을 찾는 여행을 이 책과 함께 할 수 있다. 앞의 두 책이 구체적인 가사들을 언급하며 곡의 탄생에 담긴 지역의 역사를 설명했다면, 이 책은 지역의 역사적 특징이 만들어낸 장르의 탄생과정과 그 장르의 초창기 뮤지션들 발자취를 좇는다. 머나먼 나라의 이방인이 음악을 따라 걸으며 직접 다시 그린 로큰롤 지도인 셈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11살 때 생애 첫 기타를 샀던 투펠로 철물점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물점'이라는 별명을 얻고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책을 감성 충만한 음악 여행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로큰롤의 랜드마크들을 찾아다니며 느낀 본인의 감정들을 나열하기보다는 장소, 인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과 시작점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들을 두루 들려준다.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비틀스, 척 베리, 로버트 존슨, 버디 홀리, 비비 킹, 머디 워터스 같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로큰롤 스타는 물론이고, 후대 로큰롤 스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명성에 비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초창기 뮤지션들의 일상생활과 음악인생까지 소상히 소개한다.

로큰롤 역사에서 가장 슬픈 역사를 가진 공연장 Surf Ballroom. 1959년 2월 2일, 로큰롤 1세대 선구자 버디 홀리와 ‘라 밤바’로 잘 알려진 리치 밸런스, DJ 겸 싱어송라이터 빅바퍼는 이곳에서 공연하고 돌아가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 공연장에는 그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자주 가던 식당, 명반을 녹음했던 스튜디오, 흑인 음악의 태동을 감지하고 집중 조명해 흑인음악의 전성기를 이끈 군소 라디오 방송국, 수십 년 동안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공연장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풍부한 음악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예전에 그런 곳이 있었다’가 아니라 예전에 그런 일을 하던 곳이 지금도 있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도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비행기를 타고 그 지역으로 날아간다면 역사의 현장에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버디 홀리가 죽기 전 마지막 통화한 공중전화, 로버트 존슨이 자주 가던 담배 가게, 엘비스 프레슬리가 오디션을 볼 때 서 있었던 자리까지 미국은 자신들의 고장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 달만 지나도 온갖 가게들이 바뀌고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공연장이나 음악인들의 보금자리였던 공간들도 자본의 논리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한국의 음악팬으로서 그 사소한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책을 읽는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미국처럼 김광석이 자주 가던 블루스바, 김현식이 술을 마시며 즉흥 공연을 하던 호프집, 신중현이 태어난 집, 조용필이 첫 오디션을 본 스튜디오 등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리워지는 어느 날 그곳을 찾아가 잠시나마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

Writer

오래된 정경들이 넘치는 동네에서 작은 음악 서점인 ‘초원서점’을 운영한다. 방송작가, 스크립터, 콘텐츠 기획 등을 거쳐 공연 카페에 오래 머물렀다. 올해 5월 연 초원서점에서 음악과 닿아 있는 서적들을 판매하며 책, 음악과 관련한 행사들을 기획, 진행한다. 가사가 아름다운 한국 음악들을 특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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