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가들은 무엇이든 세 손가락, 네 손가락 안에 꼽기를 좋아한다. 재즈계는 오래전부터 ‘20세기 3대 재즈 디바’로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을 꼽았다. 이와 비슷하게 국내에는 2000년대 보컬 재즈의 시대 및 재즈의 대중 보급을 이끈 세 사람의 이름이 자주 언급됐다. 나윤선, 웅산, 말로가 그들이다.

세 사람이 재즈 보컬 트로이카 시대를 연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지만, 이들의 위상과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아직도 최전선에서 활약하며 한국 재즈를 대표하고 있는 세 디바의 각양각색을 간략히 돌아봤다.

 

나윤선

평범했던 직장인, 유럽 재즈를 평정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즈 가수 나윤선은 본래 학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20대 후반에는 의류업체에서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를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는 8개월 만에 일을 그만두고, 뮤지컬 오디션에 도전해 단번에 주인공을 꿰찼다. 아버지가 국립합창단 초대단장, 어머니가 뮤지컬 1세대 성악가였으니 재능부터 타고났던 셈. 대학 시절, 전국대학생 샹송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적도 있는 그였다. 그렇게 뮤지컬, 음악극, CCM에 도전해보던 나윤선은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고자 유학길을 나선다.

3집 <Down By Love>(2003)에 수록된 ‘아름다운 사람’. 나윤선의 단아한 보컬이 매력적인 노래

유학을 떠난 나윤선의 선택은 재즈였다. 그는 유럽 최초의 재즈 스쿨인 프랑스 C.I.M에 동양인 최초로 수학했고, 동시에 3곳의 재즈 스쿨에 더 다니며 열정적으로 유럽 재즈를 흡수했다. 일찌감치 프랑스 및 유럽 유수의 콩쿠르와 페스티벌에서 수상했으며 국내에 돌아온 후에도 ‘올해의 재즈 가수상’(2000),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5), ‘한국대중음악상’ 세 차례 수상(2004, 2009, 2011) 등 쟁쟁한 상을 수없이 휩쓸었다. 부지런히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는 그에게 프랑스 정부는 문예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기도 했다.

6집 <Voyage>(2008)에 수록된 냇 킹 콜 ‘Calypso Blues’ 커버. 즉흥 녹음 기능이 있는 이펙터 루프스테이션을 활용한 실험적 면모가 돋보이는 무대

나윤선의 재즈는 그야말로 유럽 재즈의 정신을 계승한다. 그는 고전적인 우아함과 아방가르드적 실험 정신을 바탕에 두고, 절제된 감성과 단순한 악기 구성으로 실로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에 도전한다. 메탈리카와 지미 헨드릭스의 노래를 열창하고, 때로는 루프스테이션을 이용한 소리의 마법을, 때로는 유령의 소리를 흉내 내는 괴상한 스캣을 선보이기도 한다. 똑같은 형식을 반복하는 법이 없는 그의 방식은 궁극적으로 유럽 재즈, 미국 재즈, 한국 재즈의 구분을 넘어선 ‘나윤선의 음악’으로 완성된다는 평도 이어진다. 2017년 발표한 그의 앨범 제목 <She Moves On>처럼 나윤선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나윤선 홈페이지

 

 

말로

정통 재즈로 한국 전통을 노래하다

나윤선이 주로 세계 무대 최전선에서 한국 재즈의 위상을 드높인다면, 말로는 한국 재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다. 그 역시 나윤선처럼 처음에는 재즈와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었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것. 하지만 1993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으며 데뷔한 뒤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걸었고, 이후 스물셋의 나이에 재즈와 블루스에 반해 버클리 음대 재즈과에 진학한다.

3집 <벚꽃 지다>(2003) 동명의 타이틀. 전통미를 재즈에 녹여낸 말로의 스타일을 잘 알 수 있는 곡

재즈의 본고장에서 재즈를 배운 덕분일까? 말로는 세 사람 중 가장 정통 재즈에 가까운 보컬을 구사한다. 재즈 보컬로서 익숙한 타고난 허스키 보이스에, 선명하고 힘 있는 가창력, 깊은 울림을 주는 자연스러운 바이브레이션을 겸비했다. 노래의 스윙감을 중요시하고, ‘스캣의 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화려하고 역동적인 스캣을 구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말로의 가장 특별한 점은 정통 재즈에 한국적인 색을 입히기 위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나라 관객과 더욱더 쉽게 소통하기 위해 3집 <벚꽃 지다>에서는 앨범 전곡을 우리말 가사로 채웠고, 4집 <지금, 너에게로>(2007)는 모든 곡을 한국 전통 가요의 재즈 버전, 이른바 ‘케이-스탠더드(K-Standard)’로 구성했다.

5집 <This Moment>(2009) 수록곡 ‘Charade’. 기타로 반주한 원곡과 다르게 영상에서는 피아노 반주로 무대를 꾸몄다

말로의 음악 철학은 분명하다. 시대가 달라져도 누구나 따라 부르고, 바꿔 부르고 싶은 노래가 명곡이라는 것. 정통 재즈를 바탕에 두면서도 재즈와 재즈가 아닌 것을 가르지 않은 채 좋은 노래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단지 보컬만이 아닌 싱어송라이터로서 끊임없이 새 노래를 갈구하는 그의 자세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말로는 2015년 이후 ‘디바 야누스’를 맡아 운영하며 한국 재즈 역사의 다른 한 축을 지켜가고 있기도 하다. 디바 야누스는 40년 전인 1978년, ‘야누스’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재즈 클럽이다.

디바 야누스 인스타그램

 

 

웅산

재즈를 제2의 종교로, 따스한 감동을 설파하다

웅산(雄山)의 이름은 불교 법명이다. 그냥 지은 예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17세 때 승려가 되려고 절에 들어갔을 때 받은 이름이다. 아버지가 불교학자이고 친척 중에도 스님이 많을 정도로 남다른 불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수양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1년 반 정도 절에서 즐겁게 지내던 웅산은 문득 공부와 음악에 대한 미련에 휩싸여 하산을 결심하게 된다. 주지스님이 그를 간곡히 만류했지만, 웅산은 음악을 통해 수행을 이어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였다.

3집 <Yesterday>(2007) 수록된 동명의 타이틀. 웅산의 편안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보컬이 잘 드러나는 인기곡

다시 세상에 나온 웅산은 일반대학에 진학해, 교내 록그룹 보컬로 활동했다. 당시 그에게는 록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다. MBC 대학가요제에서 가창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친구가 건네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웅산은 재즈에 완전히 매료된다. 이후 재즈클럽에 살다시피 하던 그에게 재즈 1세대 신관웅이 손을 내밀었고, 웅산은 내로라하는 선배들과 한 무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재즈 공연을 하기에 국내 무대가 너무 적다고 느낀 그는 일본 무대까지 오가며 저변을 넓혔다. 양국에서 모두 실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대중음악상 2 관왕(2008), 한국인 최초로 일본 스윙저널 골든디스크(2010)를 수상하기도 했다.

들국화 1집에 수록된 ‘매일 그대와’(1985)를 전혀 다른 느낌의 달콤한 보사노바풍으로 커버한 노래 ‘On A Sunny Day’. 4집 <Fall In Love>(2008) 수록곡

웅산의 자유분방한 이력은 그로 하여금 세 보컬 중 가장 유연하고도 다채로운 음악 세계를 펼치게 했다. 그는 전형적인 재즈 보컬로 출발해 특유의 달콤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소울 넘치는 블루스를 부르기도 했고, 기존 재즈 스탠더드 외의 다양한 장르의 가요와 록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최근작 7집 <I Love You>(2013), 8집 <I’m Alright>(2018)을 통해서는 편안하고 낭만적인 스무드 재즈를 선보였다. 음악이 주는 감동을 통해 소통하려는 그의 철학과 어떤 장르든 자기만의 색으로 소화해내는 카리스마, 탁월한 곡 해석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웅산 페이스북

 

메인이미지 왼쪽부터 말로 <동백 아가씨>(2010), 나윤선 <Memory Lane>(2007), 웅산 <Temptation>(2018) 앨범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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