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팬톤 공식 온라인 스토어

미국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이 지난해 울트라 바이올렛에 이어 2019년 올해의 색깔을 발표했다. 바로 리빙 코랄(Living Coral)이다. 황금빛에 주황빛이 더해진 리빙 코랄은 한때 사람들이 찾던 핑크 뮬리 그라스처럼 살구 빛깔이 감도는 분홍색이다. 이 색은 어떤 느낌을 가진 색일까? 누군가는 낙천적인 에너지를, 다른 누군가는 생기 있는 편안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Pantone Color of the Year 2019 – Living Coral

벌써부터 화장품과 패션 업계는 앞다투어 리빙 코랄 기획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영화는 어떨까? 일찍이 적재적소에 리빙 코랄 색감을 활용한 세 영화가 있다. 바로 <펀치 드렁크 러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플로리다 프로젝트>다. 세 영화에 리빙 코랄 색감이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아랫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펀치 드렁크 러브

정신 못 차리다가(punch-drunk) 훅 들어온 사랑

<펀치 드렁크 러브>는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를 만든 폴 토마스 앤더슨의 사랑 영화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범주로 분류하기엔 이 영화, 어딘가 기묘하다. 이야기는 어리둥절한 사건으로 인물을 밀어 넣으며 시작한다. 주인공 ‘배리’(아담 샌들러)는 어딘가 꽉 막혀 있다. 사생활과 비밀을 보장해 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대들지 못하고 혼자 분을 삭인다. 갈등 알레르기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남들과 부딪히는 일이 없다. 그런 그에게 어김없이 사랑이 들이닥친다.

어느 날 배리는 사업장 인근 도로변에서 누군가가 급히 두고 간 풍금을 발견한다. 얼떨결에 풍금을 자신의 사무실로 옮긴 바로 그날, ‘레나’(에밀리 왓슨)라는 낯선 이가 배리를 찾아온다. 레나는 배리와 달리 솔직하다. 당당하게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레나를 처음 만난 이후 시리게 파랗던 배리 인생은(그는 항상 파란 정장을 입고 있다) 리빙 코랄의 빛깔로 점점 물든다.

 

사랑이 리빙 코랄로 발현할 때

책을 읽다가 감동을 주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 표시하듯 영화는 리빙 코랄이라는 색깔 지표로 배리가 사랑에 가까워지는 순간을 표시한다. 배리와 레나가 처음 만났을 때 레나는 리빙 코랄 색 옷을 입고 있다. 레나가 있는 하와이로 가기 위해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게 된 배리. 그를 배웅하는 스튜어디스의 복장 역시 짙은 분홍색이다.

레나와 배리가 함께 꿈같은 시간을 보낸 하와이는 석양빛처럼 오묘한 리빙 코랄 색을 품고 있다. 레나와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배리의 넥타이는 파란색에서 리빙 코랄 계통의 다홍빛으로 변해 간다. 마침내 사랑에 잠식된 배리는 리빙 코랄 색 글자가 새겨진 가게 안으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매트리스 맨’(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에게 이 꽉 물고 말한다. “나한테는 당신이 모르는 힘이 있어. 내가 가진 사랑, 그게 날 얼마나 강하게 하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걸.”

 

2.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현실과 가상, 그 경계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 작품답게 강박이 느껴질 정로도 정갈하고 화려한 미장센이 돋보이는 영화다. 영화는 겹으로 된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소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책을 들여다본다. 뒤이어 그 책을 집필했던 저자가 호텔의 주인인 ‘제로 무스타파’(F. 머레이 아브라함)를 만났던 과거를 회상한다. 영화는 한 번 더 플래시백해서 무스타파가 회고한 호텔의 전성기를 보여준다. 감독은 스크린 화면 비율을 달리하여 과거로 들어가는 각 지점을 구분한다. 영화의 중심 사건은 가상 국가인 주브로스카 공화국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때는 1932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실제 1937년에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이다. 어린 무스타파, ‘제로’(토니 레볼로리)는 호텔 견습사원이 되어 최고 호텔리어인 ‘구스타브’(랄프 파인즈)에게 호텔 일을 배운다. 어느 날 구스타브는 호텔 투숙객이었던 ‘마담 D’(틸다 스윈튼)의 살인사건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그는 누명을 벗어 마담 D가 자신에게 남긴 <사과를 든 소년> 그림을 찾기 위해 탈옥한다. 그 과정에서 제로는 스승과도 같은 구스타브를 매사 도와준다.

 

갈색빛을 거쳐 주황빛, 그리고 리빙 코랄까지

이 영화에서 색감은 스크린 화면 비율과 더불어 각 이야기를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한 소녀가 등장하는 현재 시점은 쌀쌀한 갈색빛이다. 이어서 책을 쓴 저자는 화자가 되고, 이야기는 한 번 더 과거로 들어간다. 오래된 호텔에서 젊은 시절의 저자는 노인 무스타파를 만난다. 이때 회상 장면은 누런 주황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황색이 호기심을 상징한다는 통설을 뒷받침하듯 저자는 무스타파의 과거와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전성기는 온통 리빙 코랄 색감으로 덮여 있다. 호텔의 전경과 각종 소품, 그리고 무스타파가 사랑한 ‘아가사’(시얼샤 로넌)의 모습까지. 영화에서 리빙 코랄은 무스타파가 기억하는 풋풋했던 순간을 되살리는 기폭제다. 젊은 저자는 무스타파에게 이제는 낡아 적자투성이가 된 이 호텔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유가 뭔지 묻는다. 애틋함이 묻은 기억의 저편을 끌어와 무스타파는 답한다. “이 호텔은 아가사를 위한 것이네. 우리는 여기서 행복했네.”

 

3. 플로리다 프로젝트

매직캐슬 라이프가 전하는 메시지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디즈니월드 근처 모텔에 거주하는 빈민 아이들의 일상을 그린다.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와 ‘스쿠티’(크리스토퍼 리베라)는 매직캐슬에, ‘젠시’(발레아 코토)는 퓨처랜드 모텔에 산다. 아이들이 겪는 가난은 구걸로 산 아이스크림 하나를 셋이서 나눠 먹을 정도다. 이들의 놀이터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모텔 구석 땅바닥, 모텔 공용 벤치, 잡초와 나무가 무성한 들판이다. 보살핌이 부재한 곳에서도 아이들은 웃음꽃을 피운다. 한없이 천진난만하지만 애써 자신들을 둘러싼 불안과 위험을 무시하는 듯하다. 감독 션 베이커는 영화를 위해 3년 동안 플로리다주 도로를 다니며 인근 지역을 조사했다고 한다. 매직캐슬 매니저이자 아이들을 보호하는 ‘바비’(윌렘 대포) 캐릭터는 실제 한 지역민을 모델로 했다. 감독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히든 홈리스의 삶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꾸밈도 없고 과장도 없다.

 

쓰러져도 계속 자라는 나무처럼

영화에서 리빙 코랄이 사용된 소품은 화려한 화장품이나 기획 상품 같은 패션 아이템이 아니다. 복도에 걸려 있는 수건과 이불, 무니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가 아무렇게 걸친 모자와 민소매, 모텔 로비에 놓인 조형물 꽃처럼 모텔 주민들의 생활용품 곳곳에서 리빙 코랄을 발견할 수 있다. 매직캐슬 주민들은 최소한의 용품으로 일상을 꾸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얻는 행복은 최저치가 아니다. 리빙 코랄은 가성비를 따진 것 같은 이들 물건에 은근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무니는 친구들을 사랑한다. 젠시는 무니의 절친이다. 젠시는 리빙 코랄로 칠해진 퓨처랜드에 산다. 젠시는 자주 리빙 코랄 빛깔의 옷을 입는다. 어스름한 분홍빛 노을이 질 무렵 무니와 핼리는 젠시를 데리고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언덕으로 향한다. 까만 밤하늘을 바탕으로 붉은 불꽃이 터지자 무니는 젠시의 생일을 축하한다. 무니는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하루를 무지갯빛으로 차근차근 채워 나간다. 쓰러져도 계속 자라는 나무처럼 무니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나아갈 것이다.

 

 

Writer

망원동에서 사온 김치만두, 아래서 올려다본 나무, 깔깔대는 웃음, 속으로 삼키는 울음, 야한 농담, 신기방기 일화, 사람 냄새 나는 영화, 땀내 나는 연극, 종이 아깝지 않은 책,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