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니 핑크>(1994)의 주인공 ‘파니 핑크’(마리아 슈라더)는 건조하고 우울한 일상에 갇힌 인물이다. 검은 모자, 검은 속옷, 해골 모형의 액세서리. 매일 죽음을 준비하며 공허함에 서서히 잠식되는 것이 영화 초반부의 주된 내용이다. 영화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Keiner liebt mich).’라는 뜻이다. 작품을 본 이들은 왠지 모르게 자신을 주인공 파니에게 대입하게 되는데, 그가 스스로를 애도하는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울은 느닷없이 침입한다. 그렇게 일상을 관통하는 우울에 면역이 없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 누군가는 우울에 대해 ‘한 철 머무는 감기’라 표현했지만 안타깝게도 감기약과 같은 손쉬운 대응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최근 유튜브에는 다양한 모습의 우울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파니 핑크처럼 자신의 우울을 만끽하는 솔직함으로 많은 이들에게 씁쓸한 공감과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Kat Napiorkowska

<LIVING WITH DEPRESSION>

유튜버 ‘Kat Napiorkowska’의 이름을 알린 영상은 <LIVING WITH DEPRESSION(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 영상은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우울이 점차 자신을 옥죄어 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거푸 가면을 덧대 보아도 행복해지지 않는, 허무에 갇힌 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우울을 덤덤히 관찰한 그의 콘텐츠는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때때로 우울의 언어를 마치 직역하 듯 정확한 증상을 서술하는 비디오에 당혹감을 표하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사실 그는 전문가가 아니며 우울증을 앓은 적도 없다. 단지 Kat Napiorkowska는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수 년 동안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가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이 우울에 대해 본인이 자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우울증이란 대개 뇌에서 진행되는 화학 반응에 의해 유발되며 그 원인은 주로 자의로 조절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LIVING WITH A DEPRESSED PERSON>

Kat Napiorkowska는 비디오를 통해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우울은 항상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우울을 맞닥뜨린 사람들은 혼자라는 생각이 유독 짙어지기 때문에, 주변에 우울로 힘들어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이 역시 <LIVING WITH A DEPRESSED PERSON(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비디오를 통해 “우울증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병이 아니며 주변의 도움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Kat Napiorkowska는 이 뿐만 아니라 강박증, 사회불안장애, 공황장애 등 다양한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Kat Napiorkowska 유튜브

Kat Napiorkowska 인스타그램

 

이모르

<자해, 정신과 치료에 대한 썰, 내가 드로잉을 하는 이유>

‘이모르’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우울을 전하는 유튜버다.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 그는 폐쇄병동에 두 번이나 입원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콘텐츠를 제작하며 상태는 점차 호전됐지만, 여전히 우울과 동고동락 중이라고 한다. 오직 흑백으로만 빼곡히 채워진 썸네일. 그의 채널은 영상 리스트에서부터 시선을 사로잡기에 더할 나위 없다. 이모르는 자신이 경험한 우울의 나락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위로하는 등 우울증에 대한 모든 것을 전개한다. 주된 콘텐츠는 드로잉 비디오. 캔버스 위로 덕지덕지 더해지는 물감은 어딘가 그로테스크하지만 전하려는 의도는 확실해 보인다. 무심한 붓칠, 분무기로 물감을 뿌리고, 작품 위로 물건을 던지기도 하며 심지어 완성된 그림을 찢기까지 한다. 1분 남짓 짧은 비디오는 드로잉에서 그치지 않고 행위 예술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한다.

<쇼미더머니6 양홍원(영비) 그리는 방법>

그의 영상에서 시선을 빼앗는 또 하나의 장치는 스튜디오에 있다. 기괴한 그래비티, 아크릴 물감이 묻은 탁자, 을씨년스러운 조형물들은 마치 맥시멀리스트의 방 한 켠을 훔쳐보는 듯하다. 이곳은 마포구에 위치한 이모르의 아뜰리에, ‘이모랩(emolab)’이다. 그림 수업, 드로잉 모임, 스튜디오 등의 용도로 사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영감이 뒤섞인 그의 공간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작품처럼 깊은 잔상을 남긴다. 모순적이게도 구독자들은 이모르 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위로를 받기도,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더 많은 이모르의 작품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모르 유튜브

이모르 인스타그램

 

안녕 아랑

유튜버 ‘안녕 아랑’은 우울증, 불안장애, 성인 ADHD를 겪고 있다. 모진 감정의 기복 속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덤덤히 기록해간다. 관계를 끊어내고 스스로를 방안에 가뒀지만, 취향을 내려놓지는 않았다고 한다. 잔잔한 무드의 영화를 보고, 글로써 생각을 정리하며, 종종 게임을 하고, 평범한 책을 읽는다. 세상의 반경이 다소 작아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서 스스로 끝없이 싸워낼 수 있을만큼 강인하다. 그는 하루 속 쓰나미 같은 우울을 이겨내는 법이나 바다를 보기 위한 여행 등 잔잔한 브이로그 콘텐츠를 선보인다. 따뜻한 톤의 영상은 낯선 이의 감정도 어루만질만큼 섬세하다. 앞서 소개한 이모르처럼 안녕 아랑 역시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리며 실제로 건강이 호전됐고, 앞으로도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담을 예정이라고 한다. 악성 댓글에 지쳐 게재된 모든 영상에 댓글을 잠시 막아둔 적도 있지만, 현재는 소통을 위해 다시 열어둔 상태이다.

최근 안녕 아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것을 접어둔 채로 11개월의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다 독립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나아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자연스레 일상에 활력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며칠 안 먹고 버티던 때에서 지금은 후식과 영양제까지 챙겨 먹을 정도의 살뜰함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해 “예전의 나는 우울에 잠식당한 상태였다면 지금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느낌이다.”라고 표현했다.

안녕 아랑 유튜브

안녕 아랑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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