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가 전 세계 영화계의 주류였던 적은 없지만, 영화사에 인상적인 작품들을 남긴 칠레 출신 감독들이 있다. 데뷔작 <세 마리 슬픈 호랑이들>(1968)를 시작으로 비평가들의 지지를 받아 온 라울 루이즈, <칠레 전투 3부작>(1975~1979) 등 칠레 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만든 파트리시오 구즈만, <엘 토포>(1971), <홀리 마운틴>(1975) 등 컬트 영화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칠레 출신 영화감독이다.

2000년대 이후로는 앞에서 언급한 감독들의 뒤를 이어서 칠레 영화사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두 인물이 등장했다. <글로리아>(2013), <판타스틱 우먼>(2016>을 연출한 세바스찬 렐리오, <재키>(2016), <네루다>(2016)를 연출한 파블로 라라인이 그 주인공으로, 칠레를 넘어 전 세계 영화인들이 주목하는 감독들이다. 파블로 라라인은 자신의 작품 연출 외에도 세바스찬 렐리오의 작품에 제작으로 참여하는 등, 두 사람의 협업은 할리우드에 진출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판타스틱 우먼>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세바스찬 렐리오(왼쪽)와 제작으로 참여한 파블로 라라인(오른쪽), 출처- ZIMBIO 

세바스찬 렐리오와 파블로 라라인의 작품에 공통으로 보이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차별과 역경 안에서 인물들의 외로움은 더욱 커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꿋꿋하게 전진한다. 지구 반대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온 영화인데, 그 안에 담긴 외로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감정이기에 마음 안에 동요를 일으킨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칠레에서 온 외로운 영화들을 살펴보자.

 

<글로리아>

칠레의 산티아고에 사는 ‘글로리아’(폴리나 가르시아)는 이혼한 뒤로 독립한 자식들과 가끔 왕래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퇴근 후 싱글 클럽에서 춤을 추며 괜찮은 상대를 찾던 글로리아는 그곳에서 만난 ‘로돌포’(세르지오 헤르난데스)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루돌포를 보며 점점 실망한다.

<글로리아>는 세바스찬 렐리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준 작품으로, 주인공 글로리아를 연기한 폴리나 가르시아는 제6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이 직접 자신의 작품 <글로리아>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글로리아 벨>이 미국에서 개봉을 앞두고 있고, 줄리안 무어가 글로리아 역할을 맡았다.

글로리아는 안경을 쓰고 다닌다. 안경을 쓰고 또렷하게 자신 앞에 있는 대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사람은 사랑일까? 중년의 글로리아는 명확히 알고 있다. 찰나의 낭만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듣기 싫어도 들리는 윗집의 소음처럼, 알고 싶지 않아도 상대의 현실적인 사정들이 낭만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글로리아> 트레일러

영화의 끝에서 글로리아는 안경을 벗고 춤을 춘다. 흐린 눈으로 춤을 추다가 다시 안경을 쓰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세월이 준 지혜는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는 일을 막아준다. 좋은 사랑은 불가한 걸까, 나쁜 사랑을 피했다면 다행인 건가, 좋은 사랑의 기준은 무엇인가. 영영 답하지 못할 질문들이 제자리에서 추는 춤처럼 맴돌다가 결국 확인하는 건 나의 외로움뿐이다.

 

<재키>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자동차 퍼레이드 중 암살당하고, 당시 그의 옆자리에 있던 그의 부인 ‘재키’(나탈리 포트만)는 현장에서 모든 걸 목격한다. 사건 이후 시간이 흐른 뒤, 재키는 자신의 저택에서 기자(빌리 크루덥)와 인터뷰하며 당시 상황에 대해 말한다. 슬퍼할 시간도 없이 장례식을 준비하던 그때의 감정에 대해서.

파블로 라라인의 첫 영어 연출작 <재키>는 흔한 전기영화가 아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전후로 그의 아내 재키(재클린 케네디)가 느끼는 감정에 집중한다. <메이저 러너>의 각본을 쓴 노아 오픈헤임이 각본을 맡았으며, 제73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영화 내내 완벽에 가까운 대칭을 자랑하는 백악관과 재키의 저택은 아름답기보다 강박적으로 느껴진다. 영부인이라는 수식어 안에서 그는 안정적이지만, 그 안에서 그의 자유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게다가 그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 또한 한정적이다. 영부인이 된 순간 평생 그 수식어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므로, 앞으로 그의 삶에는 늘 제약이 따를 거다.

<재키> 트레일러 

재키는 남편의 죽음 전에 이미 아이 둘을 잃었다. 남편까지 세상을 떠나자 영부인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서, 신부에게 고해성사한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나았을까요, 저는 이제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영부인으로만 알던 재키의 삶은 가까이서 바라보니 외로움이 팔 할이었다.

 

<네루다>

칠레 국민들에게 지지받는 시인이자 정치인 ‘파블로 네루다’(루이스 그네코)는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이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대통령은 경찰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게 네루다를 쫓는 역할을 맡긴다. 오스카는 네루다를 추적하면서 점점 그의 문장들과 자신의 삶을 연관 짓기 시작한다.

파블로 라라인이 연출한 <네루다>는 <재키>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전기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정치인 파블로 네루다의 삶을, 감독이 만들어낸 인물인 오스카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파블로 네루다를 쫓는 경찰 오스카는 그의 삶을 책처럼 읽고 해석하고, 자신의 삶에 대입해본다.

<네루다>는 파블로 네루다를 신격화하지 않는다. 공산당에 속한 의원이지만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강한 자의식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고생시키며, 아내가 있음에도 많은 여자와 밀회를 즐긴다. 네루다는 오스카의 추적을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오스카는 네루다가 남긴 글을 보며 점점 매혹당한다.

<네루다> 트레일러 

오스카는 하층민 출신으로, 경찰 임무를 하면서도 계급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린다. 오스카에게 네루다는 적이나 다름없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가 그에게 말을 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네 삶의 주인공은 너라고. 오스카뿐만 아니라 칠레 국민들의 마음에도 네루다의 시가 그렇게 말을 건다. 우린 모두 동등하다고, 지금 이 시를 읽는 순간 모두 같은 사람인 것처럼. 늘 외로웠을 오스카는 네루다의 시 앞에서 비로소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판타스틱 우먼>

낮에는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밤에는 재즈바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마리나’(다니엘라 베가)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해서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에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날 밤 갑작스럽게 오를란도가 세상을 떠나고, 의사와 경찰, 오를란도의 가족은 마리나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그를 용의자 취급한다.

<판타스틱 우먼>은 제67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칠레 영화로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주연배우인 다니엘라 베가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선 최초의 트랜스젠더 배우가 됐다. 다니엘라 베가는 처음에 배우가 아닌 시나리오의 자문 역할로 참여했다가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요청으로 직접 마리나를 연기했다.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이에게는 애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마리나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세상은 그에게 슬픔을 허락하지 않는다. 성범죄 조사관은 마리나가 자신의 응답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굴욕적인 신체검사를 진행하고, 오를란도의 전 부인과 아들은 상처가 되는 말을 쏟아내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모든 상황에서 가장 약자는 마리나인데, 약자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사려 깊게 행동하는 건 그뿐이다.

<판타스틱 우먼> 트레일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대부분의 사람이 말하지만, 마리나를 통해 본 세상은 여전히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죄인이 된다. 늘 소외된 채 세상의 변두리에 사는 이들의 삶이 영화에서만 중요하게 나오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삶은 차별 없이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가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노래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