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청소년 범죄 관련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댓글이다. 우리는 종종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의 책임을 당사자 개인이 아닌 부모에게 묻는다. 10대의 행동과 부모(가정) 간의 상관관계는 증명된 사실이지만, 범죄의 탓을 부모에게만 돌리는 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지만 진짜 원인이 무엇이든, ‘가해자의 부모’에게는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 언제나 존재한다. 그들의 입장에 서보게 하는 3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아랫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아이를 갖게 된 ‘에바’(틸다 스윈튼)와 그의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의 이야기다. 자유로운 여행가 생활을 포기하고 갑작스레 엄마가 된 에바는 사랑(모성애)보다는 책임감으로 육아를 시작한다. 이를 눈치챈 케빈은 에바의 관심을 받기 위해 짓궂은 장난을 치며 그를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에바에 대한 케빈의 집착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16살 생일에 케빈은 ‘엄마’만을 남겨 놓은 채 모두를 죽이고 만다.

과연 케빈을 가해자로 만든 건 누구일까. 케빈에게 사회적 기준(모성 신화)에 걸맞은 헌신적 사랑을 주지 못한 에바 때문일까, 사랑을 갈구하다 괴물이 되어버린 케빈의 본성 때문일까. 영화는 현명하게도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케빈을 단순히 ‘소시오패스’로, 에바를 ‘무책임한 엄마’로 규정짓지 않는다. 에바는 자유를 포기하고 엄마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였고, 케빈은 관심을 받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발버둥 쳤다. 그들은 어찌 됐든 상황을 극복하려 노력한 것이다. 둘의 관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관객들은, 이 파멸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지 고민하다 결국 포기하게 된다.

<케빈에 대하여> 트레일러

영화에서 케빈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은 자연스레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는 케빈에게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묻지만, 케빈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세상에는 “왜?”라는 물음에 답을 내릴 수 없는 사건들이 많다. 영화는 이에 대해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라고 응답한다. 어딘가에 존재할 케빈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음표를 던지다 보면, 언젠가 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러덜리스>

<러덜리스>의 포스터를 보고 신나는 음악영화를 떠올린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 영화는 사실 총기 난사 사건 가해자의 아버지, ‘샘’(빌리 크루덥)의 삶을 담는 영화다. 샘은 아들의 죽음을 겪고 난 이후, 요트에 살며 술과 함께 허송세월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아들이 만든 음악을 듣게 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우연히 작은 바에서 노래를 부르다 ‘쿠엔틴’(안톤 옐친)을 만나고, 밴드에 들어가 보컬로 활동하기도 한다. 샘은 사랑하는 아들의 노래를 부르며 꿈만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곡들이 ‘가해자의 음악’이라는 게 밝혀지고 밴드는 해체된다.

샘이 들어갔던 밴드의 이름은 ‘RUDDERLESS’였다. 키가 없는 배처럼 방향을 잃었다는 뜻이다. 영화의 초반부터 샘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홀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그곳에서 아들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외면한다. 샘에겐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 그 하나만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그가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건 바로 쿠엔틴이다. 샘은 진실이 밝혀진 후 음악을 관둘 정도로 괴로워하는 쿠엔틴을 보며, 자신의 내면에서 타인의 고통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러덜리스> 트레일러

이처럼 가해자의 부모가 짊어질 책임은 자신의 자녀가 가해자임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자식이 타인에게 고통을 줬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해자의 부모들은 언제나 샘처럼 ‘사랑’과 ‘윤리’ 사이에서 방황한다. 영화는 아들이 생전 완성하지 못했던 노래를 부르는 샘의 모습으로 끝난다. “아들아, 너의 노래를 부를 방법을 찾아낼게.” 진심을 다해 외치는 샘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더 이상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수가 없다. 그저 사랑, 사랑, 사랑만이 보일 뿐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시>

영화는 강물에 한 소녀가 떠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밀양>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다뤘던 이창동 감독은 <시>를 통해 가해자의 입장을 들여다본다. 주인공 ‘양미자’(윤정희)는 낡은 아파트에서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새로운 목표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시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이다. 단단한 1인분의 삶을 지켜나가고 있던 미자는 자신의 손주(이다윗)가 집단 성폭행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듣고 흔들리게 된다.

얼떨결에 가해자 집단에 들어가게 된 미자는 누구도 죽은 소녀의 죽음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그는 홀로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 나서지만, 소녀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큰 좌절을 느낀다. 하지만 주변으로 돌리던 눈길을 소녀(인간의 삶)에게로 돌리는 과정에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가 써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윤리 의식)을 발견한 것이다. 영화는 미자가 완성한 ‘아녜스의 노래(시)’를 소녀의 목소리로 읊으며 끝을 맺는다.

<시> 트레일러

영화에서 김용택 시인은 ‘보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진짜로’ 보는 건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녜스의 노래는 미자가 죽은 소녀를 ‘보고’ 온몸으로 써낸 시이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를 제외한 영화 속 인물들은 너무 빠르게 눈을 감는다. 편해지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짓밟는 건 이렇게나 쉽다. 하지만 우리는 두 눈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기로 하자.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정확히 보고 귀 기울여 듣는다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세상이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Writer

빛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 가끔 글을 쓰고, 아주 가끔 영상을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