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는 영화감독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 온 소재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아니고, 해가 없는 밤에만 활동할 수 있고, 인간의 피를 빨아먹어야 살 수 있는 특징은 창작자 입장에서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다. 여러 작품을 통해 진화 중인 뱀파이어 캐릭터들을 보면, 뱀파이어의 영생은 영화 속에서도 유효하다. 

성에 사는 뱀파이어가 절대적인 악으로 묘사되는 전통적인 뱀파이어 영화 외에도, 2000년대 이후에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뱀파이어 영화들이 등장했다. 뱀파이어가 인간보다 더 따뜻한 위로를 해주고, 오랜 세월을 통해 여러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쌓고, 발전하는 기술에 적응하며, 인간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외로운 세상에서 뱀파이어라도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매력적인 뱀파이어 영화들을 살펴보자.

 

<렛미인>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소년이다. 눈 내리는 밤, 오스칼은 옆집에 이사 온 소녀 ‘엘리’(리나 레안데르손)를 만난다. 비슷한 외로움을 가진 오스칼과 엘리는 금세 가까워진다. 엘리 덕분에 활력을 찾아가던 오스칼은,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뱀파이어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대부분은 겁을 먹고 도망갈 거다. 그러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라면, 눈앞에 있는 존재가 뱀파이어라도 곁에 있어 주길 바랄 거다. 사람의 온기가 부족해서 차가워진 마음은, 뱀파이어의 손보다 더 낮은 온도를 지니고 있을 테니까.

<렛미인> 트레일러

만약 뱀파이어와 친구가 된다면 그 관계가 영원할 수 있을까. 엘리는 영원히 소녀의 모습으로 살겠지만, 오스칼은 부지런하게 늙어갈 거다. 지금의 오스칼은 소년이지만, 훗날의 오스칼은 할아버지가 되어서 엘리를 위해 피를 구하러 다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늙어가는 오스칼보다 불행한 건, 무수히 많은 소년과 친구로 만나서 그들이 늙고 죽어가는 걸 목격해야 하는 엘리가 아닐까. 엘리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죽음이 예정된 인간과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없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뱀파이어 커플인 ‘아담’(톰 히들스턴)과 ‘이브’(틸다 스윈튼)는 각각 미국 디트로이트와 모로코 탕헤르에서 지내고 있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활동 중인 아담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이브는 그런 아담을 위로하기 위해 디트로이트에 간다. 재회해서 기쁨을 나누는 두 사람 앞에 이브의 여동생 ‘에바’(미와 와시코브스카)가 등장하고, 제멋대로인 에바 때문에 아담과 이브는 당황스럽다.

뱀파이어가 되어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건 거절하기 힘든 조건이다. 물론 햇빛을 보면 안 되고, 사람의 피만 먹을 수 있다는 조건이 붙긴 해도 ‘영생’은 매력적이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많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이 거론되는, 예술에 대한 헌사에 가까운 작품이다. 창작자의 삶은 유한하지만, 몇몇 뛰어난 작품들은 영원에 가깝게 기억된다. 유한한 삶에서 영원을 꿈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작을 통해 작품을 남기는 거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트레일러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면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죽을 때 끝날 것 같은 고민은 영생을 얻은 뒤로는 마침표도 없이 계속되고, 많은 이들의 죽음과 비극적인 사건들을 계속해서 목격해야만 한다. 끝이 있기에 영원을 동경하고, 영원하기에 끝을 꿈꾸는 속성 덕분에 인간과 뱀파이어는 서로에 대한 애증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매년 뉴질랜드에는 뱀파이어, 좀비, 늑대인간 등 초대받은 이들만 갈 수 있는 특별한 가면무도회가 열린다. 행사가 열리기 몇 달 전, 다큐멘터리 팀이 뱀파이어들이 사는 집에서 촬영을 시작한다. 물론 스텝들을 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목에는 십자가를 건 채로 말이다. 카메라로 살펴본 뱀파이어들은 설거지 당번 정하기, 외출 복장 정하기 등으로 분주하다.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의 감독이자 배우인 타이카 와이티티의 행보는 그와 같은 뉴질랜드 출신인 피터 잭슨을 연상시킨다. 뉴질랜드에서 <고무 인간의 최후> 등 B급 영화를 만들다가 할리우드에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연출한 피터 잭슨처럼, 타이카 와이티티도 뉴질랜드에서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등 B급 정서 가득한 작품들을 만들다가 할리우드에서 마블 스튜디오의 <토르: 라그나로크>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작품으로 추측해 보자면 뉴질랜드는 사람만큼이나 괴물도 살기 좋은 나라다.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트레일러

만약 뱀파이어와 만날 약속이 잡힌다면, 그 전에 반드시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를 챙겨봐야 한다. 뱀파이어의 장단점을 아주 적나라하게 설명해주는 작품이다. 햇빛만 조심하면 영원히 살 수 있고, 좀비, 늑대인간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감자튀김을 먹을 수 없고, 보는 눈이 많아서 변신이나 흡혈을 마음대로 하기 힘든 단점도 있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뱀파이어를 만난다면,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파악한 자신의 성향을 설명해주고 목덜미를 내줄지 결정하길 바란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배드시티’라고 불리는 도시에는 뱀파이어 소녀(세일라 밴드)가 산다. 희망이 없는 도시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소년 ‘아라쉬’(아라쉬 마란디)는 마약중독자 아버지(마샬 마네쉬) 때문에 힘들어한다. 아라쉬는 우연히 뱀파이어 소녀를 만나고, 둘은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의 서사는 꽤 익숙하지만, 매혹적인 이미지들을 가진 작품이다. 차도르를 쓴 소녀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흑백화면 위로 하우스음악부터 서부음악까지 각 장면의 정서를 보여주는 음악이 등장한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와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를 보고 나면 뱀파이어가 추천해주는 음악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아라쉬와 뱀파이어 소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건 온기다. 아라쉬는 소녀의 손이 차갑다며 어루만져준다. 흡혈할 때 느끼던 피의 온기 외에는 늘 자신의 차가운 체온만 느끼던 소녀는, 그 순간 따스한 사랑의 온기를 느낀다. 아라쉬의 손이 소녀의 손에 닿아있던 순간은 찰나지만, 소년의 손에서 옮겨온 따뜻함은 금세 소녀의 차가운 몸 전체에 퍼진다. 소녀의 차가운 체온에 금방 식어버릴 온기이지만, 마음에 남은 온기는 영생을 함께 할 것처럼 좀처럼 식지 않는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트레일러

소녀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소년은 함께 하자고 말한다. 차가운 몸을 가진 소녀는 자신을 채워줄 따뜻함이 필요하고, 희망이 없는 도시에서 점점 차가워지는 소년은 유일하게 소녀를 떠올릴 때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결국 함께할 거다. 지도에 없는 마을 어딘가에서, 밤을 걷는 두 사람을 마주치게 될 거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