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 드라마 <SKY캐슬>에 등장하는 한서진의 대사다. 최근 시청률 20퍼센트를 넘기며 국민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는 <SKY캐슬>. 염정아는 이 드라마에서 입신양명을 위해 과거를 세탁하고 의대 가문 며느리로 살아가는 콧대 높은 ‘한서진’, 딸 ‘예서’(김혜윤)를 서울대 의대로 보내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수험생 엄마를 열연한다. 간략한 설명으로도 예상할 수 있듯 염정아가 연기하는 한서진은 드라마 전체를 장악하는, 보통 아닌 캐릭터다. 배우 염정아가 자신이 곧 한서진인 것처럼 체화한 센캐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간 쌓아온 필모그래피 덕분이지 않을까. <장화, 홍련> <범죄의 재구성> <카트> 세 작품을 통해 염정아가 연기한 ‘센캐’ 변천사를 짚어 보자.

*아랫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장화, 홍련>

돌이킬 수 없는 죽음에 사로잡힌 음울한 새엄마

김지운 감독의 초기작이자 한국 영화사상 손에 꼽히는 웰메이드 공포영화로 알려진 <장화, 홍련>. 감독 자신이 “무섭고도 아름다우며 슬픈 호러영화”라고 소개했듯, 이 영화는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되 미장센을 통해 미학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고전 설화 <장화홍련전>에서 따온 영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친모를 잃은 자매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은 아버지 ‘무현’(김갑수)과 함께 새엄마 ‘은주’(염정아)가 미리 살림을 차려 놓은 외진 별장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수미는 친모의 자리를 차지한 은주와 대립각을 세운다. 음산한 집안 분위기와 맞물려 수미와 은주 모두 점점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지만 무현은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방관할 뿐이다. 어느 날 무현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은주와 수미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무현이 현장에 도착하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다.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장화, 홍련>에서 새엄마 은주는 자매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날카롭고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반전이 나타나기 전까지 영화 초중반에 등장하는 은주는 사실 수미의 또 다른 인격이다. 영화 속 은주는 새빨간 립스틱에 내내 꼿꼿이 세운 허리, 매서운 눈매와 같은 이미지로 시종일관 공포스러운 긴장감을 조성한다. 염정아가 연기한 은주는 못된 계모인 동시에 가족을 둘러싼 슬픔과 죽음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다.

김지운 감독이 은주 역할로 배우 염정아를 선택한 이유 역시 ‘젊고 아름다워서’ ‘표독한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과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별장에 흐르는 음산한 소용돌이 속에서 은주는 살기 어린 눈동자에 슬픔을 담아 영화의 메시지일 법한 대사를 읊조린다.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가 잊고 싶은 게 있는데 깨끗하게 지워 버리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거 있지. 근데 그게 평생 붙어 다녀, 유령처럼.”

 

 

2. <범죄의 재구성>

팜므파탈 사기꾼이자 구로동 샤론 스톤

<범죄의 재구성>은 <타짜> <도둑들>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의 ’범죄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최 감독이 제작자인 차 대표와 함께 진짜 사기꾼들을 만나면서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만든 영화다. 취재 과정에서 사기란 테크닉이 아닌 ‘심리전’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감독은 사기꾼들의 생생한 경험담과 입담, 개성을 녹여 ‘혓바닥’(박신양), ‘김 선생’(백윤식), ‘얼매’(이문식), ‘제비’(박원상), ‘휘발류’(김상호)라는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구로동 샤론 스톤’으로 등장하는 ‘서인경’(염정아)은 이 가운데 홍일점 사기꾼이다. 리얼 사기극을 표방한 <범죄의 재구성>은 사기꾼 5명이 한국은행을 털지만 경찰에 들어온 밀고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사기극과 묘연해진 돈의 행방 속에서 밝혀지는 또 하나의 복수극을 동시에 다룬다. 배우들의 팔딱이는 열연과 맛깔나는 대사들의 잔치에 넋 놓고 보다 보면 어느새 끝나버린 영화에 아쉬워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오후만 되면 제가 좀 나른해지거든요, 고양이 같이”

배우 염정아가 연기한 서인경은 ‘김 선생’(백윤식)에게 허술한 ‘삼류’로 구박받는 사기꾼이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사기꾼들과 달리 유일하게 진심과 거짓 사이에서 내적 줄다리기를 하는 인물이다. 그는 형의 복수를 위해 사기꾼들을 사기치는 사기꾼 ‘최창혁’(박신양)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돈에 환장한 김 선생과 달리 5억 원이 눈앞에 있어도 사사로운 감정에 거금을 포기하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섹시한 매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구로동 샤론 스톤이라고 불리지만 어딘가 어리숙한 서인경은 그래서 사랑스럽다. 당시 배우 염정아는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서인경이라는 캐릭터에 빠져들었고, 자신과 닮은 부분이 많아 편하게 연기했다고 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영화 작업을 하면서 사기꾼의 세계에 눈뜬 감독을 대신해 서인경은 말한다.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3. <카트>

미친 세상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한 <카트>는 하루아침에 부당해고를 당한 마트 계약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명필름 제작, 부지영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실제 2007년 비정규직 대량해고로 발생한 이랜드 홈에버 파업, 2011년 청소경비시설 노동자 대량해고로 발발한 홍익대 파업 등을 모티브로 삼았다.

대한민국 대표 마트 ’더 마트’에서 펼쳐지는 영화 속 노동자들의 연대와 투쟁 모습은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마트 노조원 대부분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 노동자들이다. 전 회사에서 잘린 경험이 있는 ‘혜미’(문정희), 20년간 청소원으로 살아온 ‘순례 할머니’(김영애), 팍팍한 살림을 꾸려가는 ‘옥순’(황정민), 흙수저 88만 원 세대 ‘미진’(천우희) 등이 등장한다. 주인공 ‘선희’(염정아)는 이들과 함께 힘을 합쳐 회사를 상대로, 미친 세상을 상대로 힘겹지만 뜨거운 싸움을 헤쳐나간다.

 

“저희가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에요. 저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카트>에서 염정아가 연기한 선희는 반찬값이 아닌 밥값을 벌기 위해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남매를 둔 억척 엄마다. 수당 없는 연장 근무를 묵묵히 해나가며 드디어 정규직 전환을 앞둔 선희는 어느 날 날벼락을 맞는다. 회사의 인원 감축으로 갑자기 부당 해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바보같이 일만 하던 선희는 비로소 혜미를 포함한 다른 노동자와 함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1991년 미인대회를 거쳐 연기를 시작한 염정아에게 ‘예쁘고 까탈스러운 부잣집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각인과도 같았다. 그런 그에게 <카트>의 선희 역할은 새로운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음식물 쓰레기를 무심하게 맨손으로 만지고, 밥벌이에 집안일까지 도맡아 하느라 화장은커녕 씻을 시간조차 없는 선희의 모습은 꾀죄죄하다. 하지만 그는 불의에 저항하고 타인들을 살뜰히 챙기는,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이다. 당시 선희를 만난 배우 염정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역할 잘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있었다. 뭐든 씩씩하게 해나가는 편이다”라고.

 

 

Writer

망원동에서 사온 김치만두, 아래서 올려다본 나무, 깔깔대는 웃음, 속으로 삼키는 울음, 야한 농담, 신기방기 일화, 사람 냄새 나는 영화, 땀내 나는 연극, 종이 아깝지 않은 책,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