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미술계에서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몇몇 미술상이 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터너상(Turner Prize)은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만큼 권위 있는 상. 1984년 테이트 브리튼이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이름을 따 제정한 이 상은 매년 주목할 만한 활동을 펼친 영국 미술가를 선정한다. 외국 국적이라 해도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라면 대상자가 될 수 있다. 매년 4월경 수상 후보자 네 명(팀)을 발표한 뒤 가을부터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후보자들의 전시를 개최하고, 연말에 최종 수상자를 발표하는 방식. 수상자에게는 2만5천 파운드가, 그리고 나머지 세 명에게는 5천 파운드가 주어진다.

터너상을 주관하는 미술관, 테이트 브리튼

역대 터너상 수상자들 중에는 상의 위상과 영향력을 증명해주는 이름이 많다. 1991년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1994년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95년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99년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등 지금은 모두 거장으로 불리는 이들. 터너상 전시는 보통 9월에 시작해 이듬해 1월 초까지 계속되는데 이 무렵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에 방문한다면 기존 컬렉션뿐만 아니라 수상 후보자들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나의 침대(My Bed)> 역시 1999년 터너상 전시에 등장한 작품이다.

제34회 터너상 수상자, 샬롯 프로저 ©Emile Holba 2018

 

터너상을 거머쥔 ‘아이폰 아티스트’, 샬롯 프로저

2018년 제34회 터너상은 9월 말 후보 작가 전시가 오픈한 직후부터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전시’라는 평을 들었다. 네 후보 작가들의 작품이 모두 인권이나 정체성, 인종, 이주민 등 우리 시대의 이슈들을 반영했기 때문. 또한 회화나 조각 작품 없이, 출품작이 모두 영상 작품인 전시는 터너상 역사상 처음이었다.

터너상을 받은 샬롯 프로저의 <Bridgit> 중 일부

2018년 12월, 최종 수상자로 발표된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샬롯 프로저(Charlotte Prodger)였다. 영국 본머스에서 태어난 뒤 어린 시절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그는 풍경과 언어, 성 지향성 등을 주제로 탐구하고 작업해온 작가. 이번 수상에는 몇 가지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 먼저 그가 사용한 매체다. 오래된 캠코더부터 매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 작업을 하는 그는 두 개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중 하나는 오직 아이폰으로만 촬영한 것이다. 상이 처음 제정된 시기만 해도 휴대폰 영상에 미술상을 수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터. 매년 높은 관심을 받으며 열띤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터너상답게 이번에도 화제가 될 만한 선택이었다.

샬롯 프로저의 영상 작품 <Bridgit>의 스틸 이미지

작품이 담고 있는 자전적 내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샬롯 프로저의 작품 <Bridgit>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영상. 그것은 작가가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한편의 영상 일기처럼, 나레이션에서는 자신이 커밍아웃한 이야기와 사람들이 그를 종종 남자로 오인하던 일에 관해 고백하듯 말한다. 그곳은 개방적인 도심이 아니라 그 반대의 분위기인 스코틀랜드의 시골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차 창문을 통해 비치는 시골 풍경, 바다 풍경, 페리 갑판 등 다양한 풍경과 함께 담아냈다. 심사위원들은 아이폰 카메라를 신중하고 예술적으로 사용한 방식과 더불어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섬세한 방식에도 높은 평가를 했다. 터너상을 받은 후 그는 작품에 대해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동시에 많은 성 소수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 말했다.

터너상 수상대에 오른 샬롯 프로저 ©Tate Photography (Jordan Anderson)

다양한 관점으로 유연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면 터너상의 선택은 탁월했다. 샬롯 프로저는 일기 같은 영상으로 개인적이고 고백적 형태에서 출발해, 타인과 공감하고 사회 규범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확장성을 갖춘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으로 말이다. 그는 2019년 5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되는 제58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스코틀랜드 대표 작가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샬롯 프로저의 수상 관련 영상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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