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장르를 포섭해 하나의 예술 축제로 자리 잡으며, 2019년 20주년을 맞이한 미국의 대표 페스티벌 코첼라가 그해 초 라인업을 발표한 것이 한국에서도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바로 걸그룹 블랙핑크를 포함해 밴드 혁오와 잠비나이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 이와 함께 이름을 올린 또 하나의 아시아 뮤지션이 있으니 바로 일본 그룹 ‘퍼퓸(Perfume)’이다.

데뷔 19년 차인 퍼퓸은 고향인 히로시마를 기반으로 3명의 멤버(카시유카, 아-쨩, 놋치)가 결성한 밴드로, 이후 J-POP 메인스트림의 성공 공식과 기존 걸그룹에 박힌 클리셰 같은 콘셉트를 타파해 유일무이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음악 하면 떠오르는 캐치한 코러스와 밴드 사운드 대신에 테크노를 시작으로 일렉트로-팝을 추구하며 깊이 있는 음악을 시도하고, 앨범마다 첨단 기술을 집적해 눈을 끄는 무대를 선보인다. 탄탄한 무대 실력과 매니악한 음악 덕분에 록 페스티벌에도 꾸준히 참가하는 중이다. 또한 음악 활동에서도 일본 걸그룹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인 순종적이고 유순한, 어릿광대 같은 이미지를 시도하지 않으니 그들과는 애초에 타깃층부터 다르다.

출처 - Billboard 

음가 없는 보컬 때문에 ‘표정이 없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곧잘 듣지만, 냉철하게 펼쳐지는 비트의 폭포에도 아릿한 감성과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더해 생기를 불어넣는다. 2018년 여름에 발표한 7집 <Future Pop>의 홍보로 자국 내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오는 2월부터 월드 투어를 앞두고 있다. 해당 앨범은 퓨처 베이스(future bass)라는 일렉트로니카를 필두로 또다시 ‘퍼퓸만의 사운드’를 담고 있다. 최근 퍼퓸의 차별화에는 어떤 전략이 있는지, 이번 글에서 만나본다.

 

퍼포머와 크리에이터의 조화

퍼퓸은 다른 밴드와는 다르게 철저히 본인을 퍼포머라 소개하고 있다. 가수라면 당연히 가창이 우선시되는 것은 맞지만, 일반적인 노래처럼 감정을 가득 담아 부르지 않는 기계적인 보컬이 포인트일 뿐. 이들에게 있어서는 퍼포먼스에 안무와 기술을 결합해 독창적인 무대를 꾸려내는 것이 목표다. 대규모 인원으로 이뤄진 그룹과는 다르게, 3명이 동시에 추는 칼군무는 정교하고 절도 있는 안무를 더욱 필요로 하므로 이에 쏟는 열정도 상당하다고 한다. 높은 굽의 힐을 신고 무대에 오르며 엇박자를 넘나들거나 마샬아츠(곡 ‘FLASH’)를 접목하는 등 숙련도 있는 안무를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Perfume ‘FLASH’

음악은 전적으로 프로듀서 나카타 야스타카에 의지하고 있다. 작사 작곡부터 앨범 전체 스타일링과 장르 선정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그의 역량에 따라 퍼퓸의 곡 퀄리티도 크게 갈리는 편이다. 대체로 유려하게 흐르는 베이스라인과 캐치한 후렴구 및 섬세하게 처리한 보컬이 특징이며 그가 관심 있는 장르가 바로 퍼퓸의 싱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어떤 음악이 밴드에 어울릴지 고민하지 않고 음악을 전달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 차트에서 유행하지 않는 장르를 개척하고자, 자신의 이름이 아닌 퍼퓸의 이름으로 발표한다고 한다. 물론 최근 그는 솔로 활동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출처 - ROCKIN’ON JAPAN 

대부분의 안무는 호시노 겐의 ‘코이 댄스’로도 유명한 무대연출가 미키코(MIKIKO)가 맡고 있다. 각 잡힌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불어넣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덕분에 고난도의 안무가 대부분이다. 멤버별로 서로 다른 파트를 추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일감을 추구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동작에도 사실은 가사의 의미를 하나하나 부여하여 독특함을 살렸다. 빼어난 안무와 함께 최첨단의 기술이 사용된 무대 특수효과는 영상 연출 제작사 리조매틱스(Rhizomatiks)의 작품이다. 미디어 아티스트인 다이토 마나베를 주축으로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실재와 가상의 벽을 허물게 하는 영상을 시도한다. 각 싱글에 맞게 색채감을 살리고 시각 효과를 완성하는 시디 재킷(커버 아트)은 프로덕션 제작사 트리플 오 소속 감독 세키 카즈아키가 담당한다. 역시 새로움을 좇으면서도, 그는 작품을 통해 퍼퓸이 유일무이한 그룹이 되길 바란다고 한다. ‘Magic of Love’ ‘STAR TRAIN’ ‘1mm’ 등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Perfume ‘Magic of Love’

 

기술에 온기를 담아 펼쳐낸 미래

메이저 데뷔 이후 꾸준히 전성기였던 퍼퓸이 팬층을 확보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스스로 성장하고 다양한 콘셉트로 진화했다면, 현재의 퍼퓸은 퍼포머로서 할 수 있는 시도를 최대한으로 이뤄내면서 다양한 협업을 이뤄내고 있다. 그리고 일본만이 아닌 월드와이드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출처 - Medium 

앞서 소개했던 영상 담당 팀과의 작업으로 무대마다 매번 고차원의 효과를 담아낸 만큼, 이에 대한 수요도 많이 높아지고 있다. 투어 공연에서 레이저를 쏘면 공중에 달린 볼이 터지는 효과, 다각도로 변이하는 세트 같은 현장 반응형 효과를 시작으로 지금은 안무와 사전에 준비한 홀로그램이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입체적이고 동시다발적인 효과를 주로 시도하고 있다. 일례로, 2013 칸 국제 광고제에서 은 사자상을 거머쥐면서 선보였던 모션 그래픽 공연에서는 증강현실 기술과 함께 찬연한 색감의 그래픽으로 프로젝션 매핑을 시도하고, 곡 ‘Spending All My Time’을 통해 보깅을 접목한 안무를 펼쳤다.

Perfume's Amazing Digital Light Show at Cannes Lions 2013

일본 대표 통신사 NTT도코모와 함께한 프로젝트 ‘Future-Experiment’로 선보이는 영상은 현재 꾸준히 유튜브에 업로드되고 있다. 그 시작으로 공개된 라이브 영상(Vol.01)에서는 곡 ‘Fusion’의 무대를 세 명의 멤버가 각기 다른 나라에서 펼치고 이를 하나로 합쳐냈다. 퍼퓸은 서로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제히 날카로운 안무를 해내는데 이를 통해 색다른 현장감을 유도했다. 비대칭으로 표현한 의상, 다른 색감에도 서로의 팔다리가 모여 하나의 퍼포먼스가 완성되는 와중에도 기술력은 단연 돋보인다. NTT도코모가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보급을 목표로 한 5G 라인과 Advanced MMT라는 안정적인 영상 전송 규격을 실험적으로 선보인 것이다. 런던, 도쿄, 뉴욕의 영상을 동시에 송출하거나 최근에는 자일로 밴드와 같이 야광봉을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조종하는 연출을 보이기도 했다.

<docomoXPerfume> FUTURE_EXPERIMENT Vol.1 거리를 없애라

일본 공영방송 NHK와 ‘PerfumexTechnology’라는 이름으로 홍백가합전에서 빌딩에 이퀄라이저 효과를 적용하고 수많은 레이저를 사용하거나(68회 ‘TOKYO GIRL’), 안무와 무대가 하나 되어 입체적인 연출을 하고(67회 ‘FLASH’), 작년 초엔 ‘REFRAME’이란 이름으로 모션 캡처와 동기화된 효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절도 있게 끊어지는 안무에 맞춰 노래가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데이터 처리된 그림자 영상이 변이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곧이어 팬들의 사진이 입자가 되어 자신에게 들어오거나 드론 촬영 영상과 LED 조명에 3D 그래픽을 접목한 무대가 이어진다.

Perfume X Technology at Reframe 2019

퍼퓸의 기계적이고 무기질적인 보컬은 이런 방대한 기술력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겉모습만 봤을 때는 그룹이 너무 감정 없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는 비평도 있다. 이에 대해 멤버들은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체온과 사랑으로 만든 것으로, 딱딱하고 생명이 없어 보이는 존재이지만 자신의 퍼포먼스로 새로이 태어나 생명력을 갖게 된다”라고 전했다. 발표한 곡 하나하나에 스토리를 부여한 만큼, 퍼퓸의 무대를 통해 기술이 생각보다 친근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본인의 음악도 기술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처 - ROCKIN’ON JAPAN 

이외에도 음악 외적으로, 최근에는 비디오 공유 사이트 TikTok과 협업을 하거나 ‘Perfume Closet’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의 패션을 담은 숍을 론칭하기도 했다. 퍼퓸이 이렇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던 것은 수많은 크리에이터가 소속된 자기 팀에 대한 믿음 덕분이며, 곧 다른 자국 내 뮤지션들과는 차별화되어야 한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기술을 보유한 회사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기술력을 먼저 선보여 가능성을 오픈하고자, 전 세계적으로 어필하는 퍼퓸과의 협업을 시도했다 볼 수 있다.

 

걸그룹과 아이돌의 한계를 넘어선 밴드

이전까지 아이돌 그룹에게, 뮤지션들에게는 상징과도 같은 부도관 라이브에 도전하고 록 페스티벌에 출연하는 것은 목표가 아니었다. 하지만 퍼퓸은 테크노 팝을 무기로 이 두 가지를 모두 이뤄냈으며 이후로 많은 아이돌이 이를 뒤따르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모두 탄탄한 라이브 퍼포먼스가 기반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것들이다.

출처 - UNIVERSAL MUSIC JAPAN

일렉트로니카라는 매니악한 장르로 지금의 대중성을 얻기란 무척 어렵다. 퍼퓸에게는 대중 친화적인 싱글 차트 1위 곡도 있지만, 한편으로 ‘FAKE IT’이나 ‘Party Maker’ 등의 곡처럼 심오하고 매니악한 사운드도 꾸준히 시도하며 자신의 뿌리를 지키고 그 균형을 맞추는 중이다. 그 줄타기에서 완성된 7집 <Future Pop>의 앨범 제목 그 자체가 이미 퍼퓸의 음악이다. 아릿한 멜로디에 힘을 실은 안무, 빼어난 영상미와 수준 높은 무대 퍼포먼스, 다양한 시도를 바탕으로 퍼퓸은 세계를 향한 도약을 시작한다. 걸그룹, 아이돌 그리고 밴드와 같은 수식어가 불필요한, 퍼퓸은 그 자체로 유일무이하다.

Perfume ‘Future Pop’

 

 

Writer

실용적인 덕질을 지향하는, 날개도 그림자도 없는 꿈을 꾸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