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자신이 찍고 싶은 대로 찍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미국 감독임에도 유럽에서 더 환영받는 감독, 평론가들이 늘 신작을 기다리는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에 대한 수식어는 무수히 많다. 그는 발표하는 거의 모든 작품마다 호평을 받는데, 호평 정도가 아니라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게다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을 당시의 그는 20대였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인간의 욕망을 여러 겹으로 쌓아서 보여준다. 포르노 업계, 사이비종교 집단 등 시대를 반영한 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치열하게 각자의 욕망을 위해 움직인다. 당신의 욕망은 무엇인가요? 이 한 마디에 답하기 위해 세계의 끝을 향해 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를 살펴보자.

 

<부기나이트>

1970년대 말, 스타를 꿈꾸는 17살 ‘에디 아담스’(마크 월버그)는 나이트클럽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나이트클럽에서 마주친 유명 포르노 영화감독 ‘잭 호너’(버트 레이놀즈)의 제안으로 에디는 이름까지 새로 짓고 포르노 배우 ‘더크 디글러’가 된다. 순식간에 업계 최고의 스타가 되지만, 그의 태도와 시대의 변화로 인해 그의 위치도 점점 위태로워진다.

포르노산업과 에디 아담스의 삶은 유사하다. 포르노 사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성욕에서 출발하고, 에디 아담스가 포르노스타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타고난 거대한 성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상영하던 포르노 영화는 비디오 기술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고, 에디 아담스는 자신보다 더 젊은 배우의 등장에 폭발한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에디 아담스는 포르노 업계에서 ‘더크 디글러’라는 이름과 함께 유사 가족을 얻는다. 그에게 함께 포르노를 만드는 배우와 스태프들은 일상을 함께 보내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포르노 업계에서 가족을 만들고, 스타가 되고 싶다던 인정 욕구도 채운다.

<부기나이트> 트레일러

그러나 그의 성기가 말을 안 듣게 되는 순간,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높아진 콧대로 인해 나태한 자기관리, 빠르게 바뀌는 비디오 사업, 포르노 업계를 경멸하는 사회 분위기 안에서 그의 목적지는 어딜까. 포르노 업계에서 일하기 때문에 대출도 불가능하고, 자식의 양육권도 얻지 못하는 동료들의 모습은, 그가 가게 될 길에 대한 힌트들이다.

 

<매그놀리아>

업계에서 유명한 프로듀서이자 말기 암 환자인 ‘얼’(제이슨 로바즈), 얼의 간병인 ‘필’(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얼의 돈을 보고 결혼한 ‘린다’(줄리안 무어), 여심공략법을 강연하는 ‘프랭크’(톰 크루즈), 얼의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방송인 ‘지미’(필립 베이커 홀), 아버지 지미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딸 ‘클라우디아’(멜로라 월터스), 이웃의 신고로 클라우디아의 집에 출동한 경찰(존 C.라일라), 지미가 진행하는 어린이 퀴즈쇼에서 연승 행진 중인 ‘스탠리’(제레미 블랙먼), 같은 프로에서 과거에 퀴즈왕을 했던 ‘도니’(윌리엄 H. 메이시), 이들의 삶에는 제각각의 우연이 적용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전 작품인 <리노의 도박사>(1996), <부기나이트>(1997)의 배우, 스텝과 다시 뭉쳐서 제작한 <매그놀리아>는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들 만큼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여러 사건이 동시에 진행된다. 영화의 제목인 ‘매그놀리아’는 목련 혹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거리를 뜻하는데, 감독이 딱히 의도를 가지고 만든 제목은 아니다. 감독이 우연히 만든 제목과 마찬가지로 <매그놀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속성은 ‘우연’이다.

<매그놀리아> 트레일러

우연을 통해 마주치는 <매그놀리아> 속 수많은 인물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외롭다는 거다. 이들이 외로움을 다스리는 건 가능한 일일까? 아니다, 불가능할 거다.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거라고는, 외로움은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일뿐이다. 외로움에 대한 극복을 포기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극복의 가능성이 생긴다. 나누어줄 사랑이 많은 이도, 없는 이도 동일하게 외롭다면 답은 간단하다. 누군가를 갈구하는 것. <매그놀리아>가 보여준 수많은 우연은 서로에 대한 갈구로 이어지고, 자신이 외롭다는 걸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데어 윌 비 블러드>

광부였던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석유 유전을 발굴하면서 석유업자가 된다. 공격적으로 석유 개발에 나서던 어느 날, 한 청년이 그에게 유전을 알려주겠다며 찾아온다. 청년이 알려준 곳에서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하지만, 마을의 청년 목사 ‘일라이’(폴 다노)를 비롯해서 작업에 방해가 되는 이들과 사건이 등장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에게 특별한 두 사람과의 인연이 시작된 작품이다.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작인 <팬텀 스레드>까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음악을 맡고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작품에 처음으로 출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제8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데어 윌 비 블러드> 트레일러

다니엘 플레인뷰는 석유로 막대한 자본을 얻었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자본이 그를 외롭게 한 게 아니라, 자본을 얻기 위해 외로움을 택했다. 성공을 이뤄낸 다니엘 플레인뷰가 자본을 잃는다면 그에게 더 이상 남는 게 없기에, 그는 앞으로도 더욱 치열하게 자본에 매달릴 거다. 그를 괴물이라고 일컫기보다, 그 누구라도 쉽게 괴물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마스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군이었던 ‘프레디 퀠’(호아킨 피닉스 )은 전역 후 백화점의 사진기사로 일한다. 자신이 제조한 술에 늘 취해 있는 알코올중독자 프레디의 삶은 순탄하지 않고, 어느 날 술에 취해 유람선의 한 파티장에 들어가게 된다. 프레디는 유람선에서 기억도 나지 않는 하룻밤을 보낸 뒤, 유람선 파티의 주최자인 ‘랭케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만)를 만난다. 인간 심리에 대한 연구단체이자 종교단체처럼 보이는 ‘코즈’를 이끌고 있는 랭케스터, 그는 프레디에게도 호의를 보이며 두 사람은 단숨에 가까워진다.

폴 토마스 앤더슨과 가장 많이 호흡을 맞춘 배우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폴 토마스 앤더슨과 마지막으로 함께 한 작품이 <마스터>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로, 두 배우는 제6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함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프레디는 방치된 짐승 같다. 해군으로 생활했지만, 전역 후 그를 기다리는 건 알코올 없이 버티기 힘든 나날들이다. 어디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짐승이기에 의지할 곳을 찾는다. 그가 전역 후 처음으로 얻은 따뜻한 보금자리는, 그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집단이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세뇌당한다, 아니 세뇌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스터> 트레일러

해군 출신인 프레디는 물과 같은 사람이다. 물과 같은 사람이 잠시 랭케스터가 만든 댐 안에 갇혀있다. 댐 안이 오염된 걸 알아도 그는 갈 곳이 없기에 그곳의 물살과 악취에 적응한다. 그러나 물이기에 그는 조금씩 새어 나가고, 결국 댐이 열린다. 그가 향할 곳이 맑은 바다 같은 곳이면 좋겠으나, 오염된 그가 과연 바다에 섞일 수 있을까. 세상의 자정작용은 오염된 물을 품고 희석시키기 보다, 오염된 물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세상을 부유하다 보면 우린 어딘가에서 프레디를 마주치게 될 거다.

 

<팬텀 스레드>

1950년대 영국 런던, 왕실과 사교계의 드레스를 만드는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 레이놀즈는 머리를 식히러 시골을 가던 중,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알마’(빅키 크리앱스)에게 반한다. 단숨에 알마는 레이놀즈의 연인이자 뮤즈가 된다. 레이놀즈는 집의 구조부터 일하는 방법까지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고, 늘 그의 분신 같은 친누나 ‘키릴’(레슬리 맨빌)과 함께 하고 있다. 알마는 레이놀즈가 만든 규칙 안에서 지쳐가는 가운데, 변화를 가져올 사건이 생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팬텀 스레드>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는데, 그가 연기한 의상디자이너 레이놀즈의 드레스만큼이나 <팬텀 스레드>의 짜임새는 완벽을 자랑한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직접 촬영까지 맡았고,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뷔작부터 모든 작품의 의상을 맡아온 의상 감독 마크 브릿지는 <팬텀 스레드>로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받았다.

<팬텀 스레드> 트레일러

‘보이지 않는 실’을 뜻하는 제목처럼 <팬텀 스레드>는 관계 안에서 팽팽하게 밀고 당겨지는 감정에 대한 영화다. 각자 다른 사랑을 꿈꿔온 두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은 모든 사랑에서 필수적이다.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강박을 가지고 있는 레이놀즈, 그런 레이놀즈의 마음 안에 확고한 자신의 영역을 만들고 싶은 알마, 두 사람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조금 기괴해 보이는 사랑이지만, 서로의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게 사랑이라면 이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건 분명 사랑이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