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영화 제목에 지명을 많이 넣는 감독이 있다. 바로 재중동포 출신의 중국 영화감독 ‘장률(張律)’이다. <두만강> <중경> <이리> <경주>와 더불어 2018년 개봉한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지명을 제목으로 한 그의 다섯 번째 영화이다. 공간을 영화 제목에 명시해온 만큼 실제로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 ‘공간’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크다. 그는 언제나 독보적인 시선으로 공간의 정체성을 찾아 그 안의 인물들을 섬세하게 그려왔다. 공간에서 시작하고 공간에서 끝나는 장률 감독의 영화들을 한번 살펴보자.

장률 감독

 

<두만강>

<두만강>의 배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함경도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 옌볜 조선족 마을’이다. 이 공간은 장률 감독이 2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고향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영화는 이쪽저쪽 같은 민족이 살지만 실제로는 ‘단절’되어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다. 둘로 나뉜 한반도의 사람들처럼 서로 상처를 주며 미워하는 조선족 동포와 탈북 주민들 사이에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열두 살 소년들도 있다. 배가 고파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나드는 탈북 소년 ‘정진’(이경림)과 그와 축구를 하고 싶어 쌀을 나누어주는 조선족 소년 ‘창호’(최건)이다. 하지만 두 소년이 우정을 계속 지켜나가기에 현실은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처럼 너무 차갑기만 하다.

<두만강>에는 그 흔한 배경음악도 없고 불필요한 등장인물과 대사도 없다. 절제된 대사와 감정표현, 그리고 정적인 영상들은 경계에 존재한 사람들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영화 속 어떤 인물도 크게 울거나 분노하지 않지만 그들의 아픔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관객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더불어 고향에서 같은 상황을 겪었을 장률 감독의 관조적인 시선은 영화가 더욱 정확해질 수 있게 돕는다.

<두만강> 트레일러

<두만강>이 그려내는 단절의 고통은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지금도 주변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이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게 진정한 화합의 첫 길이 아닐까.

 

<경주>

영화 속 배경인 ‘경주’에서는 왕릉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느 나라에나 왕릉은 있지만, 경주처럼 왕릉이 보통사람들의 삶과 가깝게 있는 장소는 없다. 경주가 주는 분위기가 다른 어떤 공간보다 신비로운 이유다. 장률 감독은 이러한 경주의 모습에서 죽음과 삶이 부드럽게 연결된 모습을 발견한다. 영화는 친한 형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최현’(박해일)과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가 만나며 벌어지는 1박 2일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7년 전 찻집에서 우연히 본 춘화를 찾으려 경주로 떠난 최현은 경주에서 유독 많은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몰랐던 죽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죽음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기도 한다. 경주는 이렇게 누군가의 생의 터전이 되는 동시에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이 됨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경계가 무너지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최현이 겪는 현재와 과거의 기억은 대치하고,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도저히 무엇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마치 영화는 온 힘을 다해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경주’라는 공간 자체에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 같다.

<경주> 트레일러

<경주>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누구라도 하루빨리 경주로 떠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점이다.

 

<춘몽>

<춘몽>의 배경은 디지털미디어시티와 철길 하나로 나누어져 있는 ‘수색역’이다. 디지털미디어시티는 거주지보다는 산업지의 느낌이 강해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지만, 수색역은 재래시장이 있고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어 활기찬 공간이다. 장률 감독은 이렇게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장소가 공존하는 곳을 ‘꿈 같은 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 세 남자 ‘익준’(양익준), ‘정범’(박정범), ‘종빈’(윤종빈)과 그들의 여신 ‘예리’(한예리)가 꿈꾸는 세상을 담았다.

<춘몽>의 인물들은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다. 아픈 아버지를 모시는 조선족 예리, 6개월 치 월급을 받지 못한 정범, 한물간 건달 익준, 간질을 앓고 있는 종빈. 하지만 그들이 모여 있을 땐 어쩐지 모두가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영화는 흑백 필터를 사용해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관객들은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저 그들과 함께 공존하며 울고 웃을 뿐이다.

<춘몽> 트레일러

만약 영화가 끝나고 ‘아, 좋은 꿈을 꿨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춘몽>이 주는 마법에 빠진 것이니 그 기분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영화의 배경은 제목 그대로 ‘군산’이다. 군산은 일본식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참혹한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부드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직 시인 ‘윤영’(박해일)과 돌싱이 된 ‘송현’(문소리)이 술김에 군산으로 떠난 후 일본풍 민박집에 묵게 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애매모호한 두 남녀의 이야기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인데, 장률 감독은 민족과 시대에 대한 담론을 꺼내 들며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들을 영화 곳곳에 덧붙인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전작들에 비해 좀 더 확장된 서사를 갖추고 있는 데다가 영화적 구성까지 탁월하다. 제목에서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산>은 영화 전반부의 주 무대이며, <거위를 노래하다>는 후반부에 윤영이 거위 춤을 출 때 읊는 한시의 제목이다. 2편의 이야기가 유려하게 맞닿는 부분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핵심이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트레일러

 

 

Writer

빛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 가끔 글을 쓰고, 아주 가끔 영상을 만든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