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동에 자리한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은 지난봄 개관과 동시에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된 공간이다. 서울의 중심부이지만 조금은 숨겨진 위치, 1970년대 지어진 건물을 기존의 느낌을 보존하면서 현대적 감각을 더해 재탄생시킨 점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관전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특별전 <Ryuichi Sakamoto: Life Life>를 개최해 큰 주목을 받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예술 세계를 소개한 세계 최초의 전시가 약 5개월간 이어졌고, 이 전시로 피크닉은 성공적 출발을 했다. 자연히 다음 전시에 대한 기대도 컸다.

ⓒDahye Jeong for GLINT

지난달 중순, 피크닉에서는 기대를 만족시킬 만큼 의미 있는 기획으로 두 번째 전시를 개최했다. 영국의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 특별전 <Jasper Morrison: THINGNESS>이다. 킹스턴 대학(Kingston University)과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RCA)를 졸업한 뒤 1986년 런던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는 재스퍼 모리슨은 영국을 대표하는 산업 디자이너. 그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열리는 첫 회고전이다.

재스퍼 모리슨 © Elena Mahugo

재스퍼 모리슨은 평범한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디자이너다. 그는 아무리 화려하고 장식적인 디자인이 시선을 끌더라도 우리 일상에 존재하는 실용적인 것들의 가치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이번 전시는 재스퍼 모리슨이 영감을 받은 것들과 그만의 철학이 녹아든 작품들을 통해, 사물의 가장 소중한 가치에 집중한 그의 디자인 세계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다.

ⓒDahye Jeong for GLINT

먼저,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전시의 인트로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언어가 없는 세계’는 재스퍼 모리슨이 1988년 처음 진행한 이색적인 강연을 접할 수 있는 섹션. 그는 책에서 발췌한 이미지만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 없는’ 강연을 진행해 호응을 얻었고, 이 강연은 이후 음악이 더해진 형태로 발전했다. 본격적인 작품을 만나기 전 잠시 의자에 앉아 그가 영감을 받은 다양한 이미지를 감상해보는 것은 재스퍼 모리슨의 디자인 여정을 시작하는 좋은 출발이 된다.

ⓒDahye Jeong for GLINT
ⓒDahye Jeong for GLINT
생각하는 사람의 의자 ⓒDahye Jeong for GLINT

다음 전시실에서는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제품 백여 점이 전시돼 있다. 평범하지만 그 속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있으므로 ‘슈퍼 노멀(Super Normal)’하다고 표현되는 그의 디자인 작품들. 이번 전시의 메인인 이 공간에는 1980년대에 디자인한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30여 년간의 작품을 망라해 선보인다.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생각하는 사람의 의자(Thinking Man’s Chair)’부터 최근 디자인한 안경과 펜까지 전시됐고, 비트라(Vitra), 알레시(Alessi), 삼성전자를 포함해 여러 브랜드를 위해 디자인한 제품들이 모여있다.

ⓒDahye Jeong for GLINT

먼저 눈에 띄는 건 압축 코르크를 재료로 사용한 사이드 테이블과 어떤 공간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조명 ‘글로 볼’ 등 이미 익숙하게 잘 알려진 제품들. 그리고 간결하고 기능적이면서 정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디자인이 많아 가구와 주방용품, 식기, 생활용품 등 백여 점의 제품 하나하나에 오래 시선이 머문다. 작품 배치 또한 재스퍼 모리슨 전시답게 기능적으로 구성했다. 각 디자인을 소개한 텍스트에는 그가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었고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발전시켰는지 소개하며, 이름을 붙이기까지의 과정 등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어 흥미롭다.

ⓒDahye Jeong for GLINT

이어지는 전시실에서 그의 포토 에세이가 펼쳐진다. 재스퍼 모리슨은 자신이 본 인상적인 장면들을 카메라로 포착해왔다. 마치 수집가의 몸에 밴 습관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디자이너는 사람들 누구나 가진 철저한 실용적 사고와 상식적 논리가 없다면 애초에 펜을 들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의 숨은 맥락을 상상하곤 한다는 그는 세계 곳곳에서 포착한 장면에 대해 기록한 에세이를 사진과 함께 전시했다.

ⓒDahye Jeong for GLINT

전시가 끝날 무렵 나타나는 숍과 라운지는 그의 디자인 세계를 더욱 가깝게 만나도록 배려한 공간. 그가 디자인했거나 직접 선별한 제품을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는 숍은 일반적인 아트숍과는 다르다. 전시 관람객만 입장할 수 있으므로 전시의 일부다. 재스퍼 모리슨이 이번 전시를 위해 보내온 도안대로 구현한 곳이니 런던 올드 스트리트에 자리한 재스퍼 모리슨 숍이 팝업스토어 형태로 들어온 셈. 그리고 그가 디자인한 가구들이 세팅된 라운지에서는 관람객들이 소파에 직접 앉아보고 테이블을 만져보며 체험할 수 있다.

ⓒDahye Jeong for GLINT
ⓒDahye Jeong for GLINT

재스퍼 모리슨 특별전은 어떤 물건이 좋은 물건인가를 넘어서 어떤 물건이 일상 속에서 오래 같이하고 싶은 물건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곧 소중한 것들과 함께 하는 ‘좋은 삶’에 관한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2019년은 바우하우스의 설립 100주년을 맞는 해. 이즈음 모더니즘 디자인의 계승자로 꼽히는 그의 전시를 만난다면 더욱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는 3월 24일까지 계속된다.

© Sebastian Fehr

재스퍼 모리슨 특별전 <Jasper Morrison: THINGNESS>

일시 2018.11.16(금)~2019.3.24(일), 오전 10시~오후 7시(오후 6시 입장 마감, 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 중구 퇴계로6가길 30 피크닉 piknic
입장료 일반(20세 이상): 15000원, 청소년(14~19세): 12000원, 어린이(13세 이하): 10000원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안미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