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감독상을 살펴보면 멕시코 출신 감독들이 강세를 보인다. 2018년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2015년과 2016년에는 2년 연속으로 <버드맨>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4년 감독상의 주인공은 지금부터 소개할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칠드런 오브 맨>과 <그래비티>, 두 편의 SF 걸작을 만들고 고향 멕시코로 돌아가서 <로마>를 연출한다.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영화화한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이 직접 촬영까지 맡은 작품이다. <로마>는 2018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뉴욕 비평가 협회상,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 LA 비평가 협회상에서 작품상과 촬영상을 받았다. 앞으로 열릴 시상식들에서도 <로마>는 주요 부문의 유력한 수상 후보다.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들은 일상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의 소중함을 환기시켜주고, 역동적인 롱테이크 사용 등 인물과 상황의 정서가 담긴 촬영으로 관객을 매혹한다. 영화가 삶의 연장선이 되는 기적을 만날 수 있는,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이투마마>

Y Tu Mama Tambien , And Your Mother Too|2001| 출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디에고 루나, 마리벨 베르두, 아나 로페즈 메카도

부유한 정치인의 아들인 ‘테녹’(디에고 루나)과 풍요롭지 못한 환경에서 사는 ‘훌리오’(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늘 함께 다니는 절친한 사이로, 10대 소년인 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섹스다. 둘의 여자친구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자 어떻게 놀지 고민하는 와중에, 테녹의 사촌 형수 ‘루이자’(마리벨 베르두)를 만난다. 두 사람은 루이자에게 반해서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하고, 남편의 외도에 실망한 루이자는 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투마마’라는 제목은 멕시코에서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로, ‘나 너네 엄마와도 잤어’라는 뜻이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섹스에 대해 말한다. 세 사람은 각자의 낭만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하고, 여행 과정에서 그렇게 원하던 섹스도 하게 되지만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다.

영화 <이투마마> 예고편

이들이 여행 동안 만나는 이들은 반정부시위 중인 시민들, 해변에 호텔이 들어서서 생계의 위기를 겪는 어부 가족이다. 테녹의 성 ‘이투르비데’는 멕시코의 초대 황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를, 훌리오의 성 ‘사파타’는 멕시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를 연상시킨다. 두 사람은 명확한 계급 차이를 가지고 있다. 계급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 멕시코 사회에서 이들의 여행은, 목적지도 모른 채 출발했지만 계속 함께할 수 없다는 결과를 향해갔던 건 아닐까.

 

<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en|2006| 출연 클라이브 오웬, 클레어-홉 애쉬티, 마이클 케인, 줄리안 무어

2027년은 더 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불임이 당연한 시대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무너져 가는데, 군대가 건재한 영국에는 불법 이민자들이 넘친다. 동력자원부에서 일하는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어느 날 갑자기 납치를 당하고, 자신을 납치한 건 과거에 함께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던 전처 ‘줄리언’(줄리안 무어)이다. 테오는 줄리언의 부탁으로 기적적으로 임신한 흑인 소녀 ‘키’(클레어-홉 애쉬티)의 안전한 출산을 돕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위기를 겪는다.

알폰소 쿠아론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래비티>, <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3년 연속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다. 알폰소 쿠아론의 데뷔작에서 호흡을 맞춘 뒤로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 <로마>(2018)를 제외한 모든 작품의 촬영을 맡았고, <칠드런 오브 맨>은 엠마누엘 루베즈키에게 제63회 베니스영화제 기술 공헌상을 안겨줬다. 그가 촬영을 맡은 수많은 장면들 중에서도 <칠드런 오브 맨>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시가지 전투장면은 롱테이크가 역동적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이다.

<칠드런 오브 맨> 트레일러

<칠드런 오브 맨>이 그려낸 미래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맞닿아있다. 닭장 같은 곳에 갇힌 채 고립된 난민들, 정부가 노년층에 대한 복지비용이 없어서 보급하는 자살약,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게 기적에 가까운 사회 배경까지, 만약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곱씹게 만든다.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당연한 명제가 각박한 삶 속에서 잊혀 가는 가운데, <칠드런 오브 맨>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가치에 대해 숭고한 방식으로 말한다.

 

<그래비티>

Gravity|2013| 출연 산드라 블록, 조지 클루니, 에드 헤리스

우주 탐사 중인 베테랑 임무 지휘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 초보 임무 수행원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코왈스키는 교신을 통해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라이언은 수리에 열중하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던 이들에게 러시아가 미사일을 쏴서 인공위성을 폭파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위성의 잔해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을 거라는 초기예상과 달리, 연쇄적인 충돌로 인해 파편이 이들을 덮친다. 충돌로 인해 라이언은 홀로 나가 떨어지고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비티>는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 중에서도 ‘체험’의 성격이 가장 강한 영화다. 우주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라이언의 순간순간은 관객들에게 생생한 체험이 된다. 우리의 지리멸렬한 삶을 지탱하는 중력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래비티> 트레일러

코왈스키와 라이언은 우주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계속해서 지구에 대해 말한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구에 있을 당시에 자신의 일상이 어땠는지. 그들의 몸은 우주에 있지만 마음은 지구에 있는 듯 보이고, 지구에서의 더 좋은 삶을 위해 우주를 유영 중인 것만 같다. 코왈스키가 영화 초반에 하는 말들은 쓸데없는 소리 같지만, 우리 삶에서 무엇이 의미 있고 없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저 삶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의미 있는 일 아닐까. <그래비티>의 우주를 보면서 삶에 대해 성찰해본다.

 

<로마>

Roma|2018| 출연 얄리차 아파리시오, 마리나 데 타비라, 낸시 가르시아 가르시아, 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멕시코 중산층 가정의 가정부로, ‘안토니아’(페르난도 그레디아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 부부와 그들의 4남매를 자기 가족처럼 돌본다. 그러나 안토니아, 소피아 부부 사이의 불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페르민’(페르민 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과 생긴 갈등으로 클레오는 힘들어한다.

<로마>의 배경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동네 ‘콜로니아 로마’로 알폰소 쿠아론의 고향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4남매 중 한 명은 어릴 적 알폰소 쿠아론 자신이고, 당시 가정부이자 실제 클레오 역할의 모델인 리보 로드리게스와의 대화와 자신의 기억을 더해서 <로마>를 완성했다. 그 결과, 우익무장단체 로스 알코네스가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면서 100여 명을 살해한 역사적 비극인 ‘성체 축일 대학살’을 비롯한 당시의 순간들이 클레오의 시선을 통해 재현된다.

알폰소 쿠아론은 비전문 배우들을 영화에 캐스팅하고, 촬영 당일에 배우들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알려주는 식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캐릭터와 상황에 대한 분석이 불가한 상황에서 배우들은 마치 실제 삶에 어떤 상황이 주어진 것처럼 연기했고, 덕분에 <로마>는 영화를 넘어서 생생한 삶을 목격하는 느낌을 준다.

영화 <로마> 예고편

삶에서 어떤 순간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어떤 영화는 마법처럼 다가온다. <로마>는 영화가 어떻게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영화가 보여주는 한 개인의 삶을 보면서 이렇게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흑백화면에다가 일상의 소음이 음악을 대신하고, 비전문 배우가 마치 자신의 삶처럼 어떤 순간을 만들어내는 <로마>는 ‘상처받은 이들의 연대’라는 영원히 낡지 않을 메시지를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시 한번 읊어준다.

 

Writer

에세이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달리다 보면> 저자. 좋아하는 건 영화, 여행, 음악, 문학, 음식. 특기는 편식. 꾸준한 편식의 결과물을 취향이라고 부르는 중. 취향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김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