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이자 미학자였던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에 등장하는 말이자 진은영 시인이 2008년도에 발표한 ‘2000년대 시에 대하여’라는 비평글에 주요하게 차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결국 이야기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들을 다시 조명하고 새롭게 재분배함으로써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이 말에 담겨 있다. 이것은 문학이, 영화가, 음악이, 더 나아가 한 매체가, 예술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과 그 안에서 생동하는 감각과 감정을 새롭게 조명해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바운더리는 우리가 겪고 보는 것 이상으로 넓어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평생의 시간 동안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인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인간에 대한 지평 또한 내 주변에 있는 것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 영화를 선택한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의 공포와 절망을 마주할 수 있고, 중국 문화대혁명 속 경극 배우의 인생을 엿볼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영화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생생하게 구현된 수백의 다양한 인생을 엿보았다. 이는 영화가 다양해야 하는 이유를, 그리고 우리가 그 영화들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백인 남성,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감정과 시선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에야말로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6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포스터

그에 대한 일환으로, 2013년도부터 한국에서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이주민과 난민의 삶뿐만 아니라, 주류적 가치에서 벗어나 다양한 정치적 신념과 정체성을 지향하는 마이너리티의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마이너리티의 영화들. 단어에서부터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벌써 수많은 ‘경계인’ 감독들이 좋은 이야기라는 향기를 품고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를 실천하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세 명의 디아스포라 감독들을 소개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부터,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감독까지. 이들이 만드는 영화가 과연 어떤 감각을 재분배하고 있는지,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는지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다.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혔던, 이안

이안 감독

이안 감독은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국공내전 때, 대만으로 이주하였고, 지금은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는 한 인터뷰 매체에서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고 털어놓았으며,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이런 면모들은, 성별, 인종, 국적을 초월한 드넓은 영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다는 말과도 동일한 의미가 된다. 그는 한 사람이 모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화를 제작했다.

<음식남녀> 오프닝 신

그는 <음식남녀>(1994)를 통해 엄마의 부재 속에서 갈등을 느끼는 가족을 음식에 빗대어 그리기도 했고, <색, 계>(2007)에서 1930년대 홍콩에서 활약하는 스파이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가 미국에서 만들었던 영화들은 더욱 놀랍다.

<브로크백 마운틴> 트레일러

<브로크백 마운틴>(2005)에서 서부 카우보이들의 사랑을 미국인만큼이나 ‘미국스러운’ 정서를 살려 만들었고, <라이프 오브 파이>(2012)로 망망대해에서 살아남는 인도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트레일러

그가 미국에 정착하여 처음 만들었던 영화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는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이다. 그가 이 영화를 선보였을 때, 수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이 대만인이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안 감독이 이렇게 장르, 인종, 국가를 넘나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인간’에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관심을 두고 그리고자 했던 것은 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정과 감각은 ‘이방인’의 것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사자성으로 만들어 낸 감정은, 그 인물들이 어떤 환경에 있든 생생히 파동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관념으로 인물을 만들어내는, 장률

장률 감독

김지미 평론가는 장률 감독에 대하여 “어디에서 영화를 찍어도 경계인만이 가진 거리감을 확보할 줄 아는 감독이며 그 거리감을 통해 현실 속의 인물을 관념의 세계로 침잠시킨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재중동포 출신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영화를 주로 제작하였다. 경계인으로서 당사자성을 갖고 만들어낸 그의 영화는,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을 새로운 영화적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그가 만든 영화 속 ‘조선족’, ‘중국인’, 그리고 ‘한국인’들의 모습은 우리가 영화 내에서 흔히 봐온 모습과는 어딘가 다르다.

<망종> 트레일러

영화 <망종>(2005)은 조선김치를 팔며 사는 조선족 여성. ‘최순희’(류연희)의 일생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변방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순희의 일생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전시하지도 않는다. 묵묵히 그의 뒤를 밟으며 순희의 시선으로 바라본 살얼음 같은 세계를 그려낸다. 장률 감독은 순희의 감정을 방해하는 요소를 최대한 절제하고, 텅 빈 그의 마음만큼이나 비어 보이는 거리를 담아낸다. 오로지 무감각함 속에 일말 남아 있는 그녀의 조각난 감정을 찾아 헤맬 뿐이다.

<풍경> 트레일러

다큐멘터리 영화 <풍경>(2013)은 한국에서 일하는 14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인터뷰하여 필름에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다. 우리 영화 속에서 희화화되고, 여전히 목소리를 빼앗긴 채 동정 혹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은, 마이크를 고스란히 전달받아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어떠한 편견도, 프레임도 없이. 그렇기에 장률 감독의 영화는 영화 자체가 서사의 편견에 얽매여 있지 않다. 그는 한 사람의 감각을 스크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죽음, 삶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어 환상으로 재현한다. 그렇다고 ‘판타지’라고 장르화할 수 없는 이 영화들은 그 장르적 특성마저 자유롭다.

 

이주가 곧 인류 전체의 역사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마하마트 살레 하룬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

세계 최빈국, 미국에서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던 아프리카 ‘차드’ 공화국 출신 감독인 마하마트 살레 하룬은 전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신예 감독이다. 그는 차드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차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제작한다.

<프랑스에서의 한 철> 트레일러

<프랑스에서의 한 철>(2017)은 프랑스로 이주한 차드인이 난민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소송에도 실패하자 결국 분신자살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누구보다 처절한 마음으로 만들어냈다. 그 역시 난민 출신이었고, 자신이 차드에 관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차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세계 영화산업을 큰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면, 자신은 그중에서도 매우 작은 나만의 악기를 담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방인, 그리고 마이너리티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곧 여성의 문제로도 이어졌다. 그는 차기작으로 차드에서 불법인 낙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15살 소녀와 그 부조리한 시스템 아래서 싸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는 모든 여성에 대한 헌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언급하며, 앞으로 난민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마이너리티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확장해 나갈 것이라는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내가 차드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것 같다”라고 얘기했던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아무도 조명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누구도 나서서 이야기하거나, 들어보고자 하지 않는 삶의 조각들. 이제는 이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가 왔다.

 

 

메인 이미지 <망종> 스틸컷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