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 포르노(Roman Porno)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일본 영화계는 황금기인 1950~60년대를 지나 1970년대 침체기를 맞는다. 대형 영화 산업의 틈에서 자생하던 독립 영화사의 에로 영화, 이른바 ‘핑크 영화’가 도산 위기를 맞은 메이저 영화사 닛카츠(日活)의 특별한 방침을 통해 일본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진출한다. 닛카츠에서 보유한 인력과 영화기술을 바탕으로 저예산 로망 포르노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지킬 것은 오직 하나, 일정 시간의 야한 장면만 있으면 어떤 영화를 만들든 상관하지 않았다. 주제는 연애와 성애에서 그치지 않고, 공포, 판타지, 정치로 번졌다. 재능 있는 감독 지망생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었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데뷔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로망 포르노물은 높은 인기를 누리며 10년 넘게 일본 영화 산업을 이끌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데뷔작 <간다가와 음란전쟁(神田川淫乱戦争)>, 수오 마사유키의 데뷔작 <변태 가족 형의 새 각시(変態家族 兄貴の嫁さん)>도 이 시기에 나왔다.

▲ 하야시 유미카 전기 <여배우 하야시 유미카> 표지

로망 포르노물의 여러 배우 중에서도 하야시 유미카(林由美香, 1970~2005)가 지닌 표상은 무척 남다르다. 평범한 모습으로 친근함을 유발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공기 같은(이 글에서 소개할 한국 영화 <도쿄 유부녀 준코(東京の人妻 純子)>(2000)에서도 순종적으로 보이지만 끝내 그렇지 않은 일본인 아내를 연기한다. 그는 거의 많은 영화에서 일종의 환상적으로 불일치성을 지닌 묘한 존재로 그려졌다. 반대로 평범한 역할도 그가 맡아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물. 그의 삶 자체가 영화가 되고, 영화로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34세 생일 하루 전날 죽었다. 

 

<감독실격(監督失格)>(2011)

이 영화의 감독인 히라노 가츠유키(平野勝之)는 AV 배우와 지방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니며 영화를 찍는 것이 전매특허다. 배우의 미모나 명성보다 자신의 영화 세계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배우와 작업하려는 버릇을 가졌으며, 실제 영화 촬영에서도 혹독한 면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1997년 감독과 배우로 두 사람은 만났고, 영화이자 자전적인 다큐멘터리 <도쿄~레분섬 41일간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도쿄로부터 홋카이도까지 41일간 노숙을 하며 자전거 여행을 떠났고, 불륜 관계가 된다. 이 영상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계속 새로운 이름으로 비디오, 영화판, DVD로 만들어졌다. 2005년, 하야시 유미카는 집에서 자연사한 상태로 발견된다. 큰 충격을 받은 히라노 가츠유키는 이후 영화를 한 편도 만들지 못한다. 한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는 극장판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준비하며 정신적으로 지쳐있을 때 히라노 가츠유키와 하야시 유미카의 불륜 여행을 보고 기운을 찾는다. 보답으로 히라노 가츠유키 감독에게 다시 영화를 만들 것을 제안하며 제작을 약속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감독실격>이다. 히라노 가츠유키 감독의 부활이자 지난 5년간 참아온 하야시 유미카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연가이다. 아래 영상은 <감독실격>의 예고편. 안노 히데아키가 제작했으며, OST는 음악가 야노 아키코가 담당했다. 

 

<안녕 유미카(あんにょん由美香)>(2009)

1977년생의 재일교포 감독 마츠에 테츠아키(松江哲明)는 자전적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작업하는 감독이다. 동경했던 배우 하야시 유미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농담처럼 흘린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마츠에군 아직도 멀었네.” 마츠에 테츠아키 감독은 하야시 유미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던 중 한일합작 영화인 <도쿄 유부녀 준코>(2000)를 알게 된다. 한국이 배경이면서도 출연하는 배우가 모두 일본어 대사를 치는 등 이상한 구석이 많은 이 영화에 마츠에 테츠아키 감독은 매료되고, 한국을 찾아 영화와 배우 하야시 유미카의 흔적을 찾아간다. 이 영화 안에는 집요한 한 사람(감독 자신)의 흥미로운 면모와 한국의 쇠퇴한 에로 영화 산업, 절대로 한자리에 모일 일 없는 에로 영화계 한국 스태프와 일본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여 요절한 배우에 대해 상념을 나누는 진귀한 모습이 담겨있다. 이들이 나누는 이야기 중 “누구나 준코를 사랑하지만 준코를 얻을 수 없어, 마치 하야시 유미카와 같이”라는 대목이 남는다. 회고전, 영화, 전기까지 끝없이 회자되는 하야시 유미카라는 배우로의 동경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다. 예고편을 보자.

 

<도시락(たまもの)>(2004)

닛카츠는 1988년 공식적으로 로망 포르노 제작을 그만둔다고 공표했다. 로망 포르노를 보고 자란 이들 중 몇은 현재에는 그다지 쓸모없어진 로망 포르노 법칙을 받들어 영화를 제작한다. 이마오카 신지 감독은 당시 3세대 로망 포르노 유망주로 등장했다. 70분 안에서, 10분에 한 번 간격으로 에로신을 넣고, 예산과 제작 기간만 맞추면 되는 법칙을 지켜 영화를 만들었다. 이마오카 신지 감독의 작품은 대중에게 익숙한 일본 영화 특유의 청명함과 큰 탈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35세의 주인공은 연하의 집배원과 사랑에 빠지고, 집착적으로 도시락을 배달한다. 65분의 별 내용 없는 이야기이지만, 영화 속의 하야시 유미카는 어디서도 보기 드문 공허함과 광기를 표출한다. 이 영화로 하야시 유미카는 제17회 핑크대상 여배우상을 받았고, 2000년대 중반 로망 포르노 붐의 기폭제가 되었다. 아래는 팬이 만든 듯한 <도시락> 편집 영상. 노래는 <감독실격>의 주제가를 사용했다. 

 

Writer

매거진 <DAZED & CONFUSED>, <NYLON> 피처 에디터를 거쳐 에어서울 항공 기내지 <YOUR SEOUL>을 만들고 있다. 이상한 만화, 영화, 음악을 좋아하고 가끔 사진을 찍는다. 윗옷을 벗은 여성들을 찍은 음반 겸 사진집 <75A>에 사진가로 참여했다.
박의령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