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당당하고 주도적인 여성을 그린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한다는 소식.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지난 7일 막을 내렸지만 여성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계속 이어진다. 6월에 개봉하는 영화들은 장르도, 내용도 다양하다. 공통점은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는 것. 실화를 바탕으로 한 묵직한 드라마부터 실존 인물을 그린 다큐멘터리까지 개봉 영화들 네 편을 소개한다.

 

<밤쉘>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 2017|감독 알렉산드라 딘 | 출연 헤디 라머, 다이앤 크루거, 피터 보그다노비치, 제닌 베이싱어 |국내 개봉 2018.6.7

‘밤쉘(Bombshell)’은 ‘깜짝 놀랄 소식’, 그리고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이중적 뜻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밤쉘>은 배우 헤디 라머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 1913년 태어나 2000년 생을 마감한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할리우드에서 활약했다. 1993년 <엑스타시>로 데뷔하며 스타로 떠올랐고 1940년대 다양한 작품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으며, 당시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배역에 한계를 느끼고 직접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밤쉘> 스틸컷

뿐만 아니다. 그는 발명가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작곡가 조지 앤타일과 함께 보안을 강화한 기술인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다. 그것은 이후 와이파이와 블루투스 등 현대 이동통신의 기반이 되는 기술로 발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배우가 내놓은 발명이란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 기술은 1980년대가 되어서야 세상에 공개됐다. 외모로만 평가받는 여배우라는 위치에서 지적인 면모, 특히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진 과학 분야에서 드러난 재능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무시당한 것이다.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헤디 라머는 이런 씁쓸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시대를 앞서간 그의 인생 여정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여성들이 모였다. <밤쉘>은 여성 감독 알렉산드라 딘이 연출했고 배우 수잔 서랜든이 제작했으며, 다이앤 크루거가 인터뷰이로 참여한 작품.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수십 개 영화제에서 상영하며 화제가 됐다.

<밤쉘> 예고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Visages, Villages, Faces Places | 2017|감독 아녜스 바르다 | 출연 아녜스 바르다, 제이알 |국내 개봉 2018.6.14

제20회 서울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 중 한 사람인 아녜스 바르다가 사진작가 JR과 함께 작업한 로드 트립 다큐멘터리. JR은 2018년 타임(TIME)지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90세의 노장 감독이 30대의 사진작가에게 함께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 뒤 즉흥적인 여행이 시작됐고, 두 사람은 트럭을 한 대 구입해 프랑스 시골을 누비며 작업을 이어간다. 그들이 다닌 곳은 탄광 마을, 염산 공장, 항구 등. 두 사람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찍고 그것을 크게 프린트해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 터전에 전시한다. 여행 중 만난 이들을 포착해 작품으로 전시하며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한 작업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스틸컷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에는 특히 감동적인 여성들의 얼굴도 있는데, 탄광과 항만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 여성의 존재가 작품이 되어 전시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세계 영화계에서 중요한 여성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의 신작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를 모으는 이 작품은 제90회 아카데미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고 제7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골든아이상을 받는 등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6월 14일 개봉한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예고편

 

<허스토리>

Herstory | 2017|감독 민규동 | 출연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국내 개봉 2018.6.27

한국영화 중에도 반가운 여성 영화가 있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6년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재판부에 맞섰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그들과 함께 싸운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중 최초로 보상 판결을 받아낸 매우 의미 있는 재판이지만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실화를 민규동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이름만으로도 믿음직스러운 여성 배우들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재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을 맡은 김희애는 당찬 사업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고 적잖은 일본어 대사도 소화했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연기한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은 모두 깊은 연기 내공을 갖춘 배우들. 문정숙이 운영하는 여행사의 직원으로 분한 이유영, 그리고 문정숙의 친구로 출연한 김선영의 존재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허스토리> 스틸컷

이 작품의 슬로건은 ‘not history, but HERSTORY’. 역사가 남자의 이야기 위주로 쓰였다면, 이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새로운 역사를 쓴 ‘그녀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온 마음을 다해 연대하고 증언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6년간의 치열한 재판 과정을 영화로 접하고 나면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허스토리> 예고편

 

<거룩한 분노>

Die gottliche Ordnung | 2017|감독 페트라 볼프 | 출연 마리 루엔베르게르, 맥시밀리언 시모니슈에크, 레이첼 브라운쉬에이그, 시빌레 브루너 |국내 개봉 2018.6.28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란 문구 아래 다섯 명의 여성들이 당찬 걸음으로 다가오는 포스터가 인상적인 <거룩한 분노>. 이들은 무엇에 분노하는 걸까? 이 작품은 여성 감독 페트라 볼프가 연출한 스위스 영화로,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용기를 낸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들의 분노는 남자들과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다. 이 영화는 서구사회 중 가장 늦은 1971년에서야 여성참정권이 인정됐던 스위스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활약한 여성들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줄 것.

<거룩한 분노> 스틸컷

단순히 참정권을 얻는 과정뿐 아니라 여성이 주체가 되는 삶과 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섬세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려냈다. 2018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로 올랐고, 지난 제11회 여성인권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주인공 ‘노라’ 역을 맡은 배우 마리 루엔베르게르는 16회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거룩한 분노> 예고편

 

메인 이미지 <밤쉘> 공식 포스터 편집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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