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고 많은 일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인상이 남아서 별 것인데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안타까운 죽음이 있는 반면 왜 아직 살아있나 싶은 존재도 많았다. 한 달 한 달이 ‘11월 괴담’이고 카오스였다. 이런 한 해를 복기하는 건 괴로운 일이니 각자 구성진 술판에 쏟아내고, 우리는 암흑 속에 빛나던 별똥별들을 짚어본다. 아주 잠깐 빛났을지라도 누군가의 눈엔 진하게 잔상이 남았던 문화예술계의 인상적 움직임을 <인디포스트>의 시각으로 골랐다. 먼저 영화다.

 

PICK! 인상적인 영화감독, <우리들> 윤가은

올해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윤가은 감독과 배우 최수인

윤가은 감독이 주목하는 세계는 일상적인 듯하면서 특별하다. 인물들은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며, 동심을 지녔으면서도 한편으로 어른스럽다. 앞서 감독이 만든 단편 <손님>(2011)과 <콩나물>(2013)이 그랬고, 장편 데뷔작 <우리들>도 다르지 않다. <우리들>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외톨이 ‘선’과 비밀을 가진 전학생 ‘지아’의 복잡미묘한 여름날을 다룬다. 사랑, 미움, 질투, 모든 감정이 휘몰아치는 열한 살 소녀들의 세계는 표현에 서툴고 사람에 멍든 어른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아이들을 향한 감독의 뛰어난 관찰력과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이 녹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잊고 있던 유년 시절의 감정과 추억들을 보석처럼 발견해내는 윤가은 감독의 세계를 경험했다면, 모두가 비슷한 마음으로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인디포스트> 관련 기사
‘독립영화계가 주목한 여성 감독들, 누가 있을까?’ [바로가기]

‘<우리들> 윤가은 감독이 연출한 단편영화 <손님>’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연기, <아가씨> 문소리의 10분, <비밀은 없다> 손예진의 100분

<아가씨>의 문소리는 등장하는 신마다 기묘하고 비틀어진 공기를 만들며 화면을 장악했다. 히데코도 숙희도 야무지고 아름다웠고 사사키 부인도 강렬했지만, 히데코 이모 역을 맡은 문소리는 이 모든 덕목을 아우른 끝에 짧은 특별출연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반면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은 102분 런닝타임을 오롯이 혼자, 마음껏, 그러면서도 억척스럽게 독차지했다. 청순가련하기만 할 줄 알았던 배우가 소처럼 일하며 일궈낸 풍요로운 논과 밭. 우리는 그곳에서 나오는 열매들을 조금씩 맛보다 마침내 풍년이 들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다. 고마운 일이다.   

 

PICK! 인상적인 데뷔, <우리들> 최수인

<아가씨>(2016)의 김태리는 이미 많이 다뤘다. 뉴페이스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아이들 연기에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정지우 감독이 영화 <우리들>을 두고 한 말이다. ‘똑단발’에 야무진 눈매, 한편 맑고 선한 눈망울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배우 최수인은 영화에서 열한 살 주인공 ‘선’을 연기하며 복잡미묘한 감정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친구를 위해 봉숭아 물을 들여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 이후 돌변한 친구의 태도에 마음 졸이는 선의 모습은 흡사 옆집 꼬마애의 우정을 훔쳐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꾸밈없다. 말갛고 수수한 얼굴이 더없이 매력적인 아역 배우 최수인을 필히 올해의 발견이라 부르자. 

 

PICK! 인상적인 존재감, 연상호

연상호 감독 <부산행>, <서울역> 관련 인터뷰 (출처-한겨레TV)

특유의 거친 그림체에 통렬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아내며 국내외 애니메이션계에 독창성을 확립해온 연상호 감독. 애니메이션 영화감독이었던 그가 시도한 ‘첫’ 실사영화이자, 국내 ‘최초’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은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노파심을 부수고 올해 국내 극장가에서 유일하게 천만 관객 달성의 명예를 얻었다. 실사 영화 <부산행>의 프리퀄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례적인 방식으로 공개한 <서울역>도 마찬가지. 국내 ‘최초’ 좀비 애니메이션이라는 독특한 소재 아래,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가감 없이 드러내 온 감독 특유의 작품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연상호는 국내외 관객들에게, 그리고 감독 본인에게도 전에 없던 ‘최초’의 존재감을 뽐내고야 말았다.

<인디포스트> 관련 기사 ‘괴물 같은 감독의 ‘청불’ 애니메이션들- <부산행> 연상호 감독 전작 모음’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커플, <아가씨> 히데코와 숙희, 김민희와 김태리

귀족 아가씨와 그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 백작으로부터 거래를 제안받은 하녀, 아가씨를 지배하려는 후견인이 서로 속고 속이는 복잡한 서사 속에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아가씨와 하녀, 히데코와 숙희의 속 시원한 사랑이었다. 동성애, 페미니즘 같은 주제를 굳이 긍정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이 커플의 사랑을 흔쾌히 찬성해야 했다. 음흉한 후견인 이모부도, 아무리 잘 생겼다고 한들 오직 막대한 재산만을 노리는 속물 백작도 아가씨를 사랑할 자격 따위는 없었기 때문이다. 겁 없는 눈망울로 오로지 한 여자를 사랑한 숙희만이 외로운 삶을 살아온 아가씨의 인생을 망치고 히데코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은 뜬금없는 동성애가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권선징악.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강렬했던 그들의 사랑은 김민희와 김태리 덕에 더없이 예쁘기까지 했다.

<인디포스트> 관련 기사 '이번 주 개봉작 <로렐>을 비롯한 다양한 ‘퀴어시네마’를 살펴보다'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아재, 김의성

연예인도 공인이라 불리는 세상에서 배우 김의성은 SNS를 통한 사회 비판을 거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구석에 똬리를 틀고 키보드로만 떠드는 것은 아니다.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것은 물론, 해고 노동자, 위안부 피해자, 세월호 유족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본업을 잊은 것도 아니다. 2016년 한 해 동안 그는 드라마 3편, 영화 5편에 얼굴을 내밀었다. 캐릭터가 비슷했냐 하면 것도 아니다. 나만 살겠다고 발악하는 <부산행>의 ‘명존쎄’ 캐릭터 용석과, 실없고 카리스마도 없이 동네를 거니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김중행만 봐도 그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다. 김의성은 어떻게 오지랖 넓은 아저씨가 됐나. 서울대 경영학과 84학번이 연극에 빠져 지내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로 주목받고, 돌연 베트남으로 가 사업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홍상수와 재회, <북촌방향>(2011)으로 복귀한 뒤 오늘이 왔다. 그 사이 재능, 패기, 도전을 경험한 젊은이는 이제 ‘아저씨’가 됐다. 하지만 아저씨가 어때서. 누적한 세월만큼 똑바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연기하는, 허투루 나이 들지 않은 아저씨란 얼마나 멋이 있나. 스스로도 “저 양반 재밌어, 저 아저씨 펑키한데? 나를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줬음 좋겠다[관련 기사]”라고 말하는 그는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가장 올바른 예시다. 

 

PICK! 인상적인 독립영화, <4등>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폭력 문제나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를 향한 비판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었을까. 그런데도 여전히 불편하고 폭력적인 우리 사회의 교육 풍토에 대해 영화 <4등>은 더욱 직접적으로 질문한다. “꼭 1등만 해야 하나요?”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지만 대회에만 나가면 늘 4등인 준호. 그런 아들을 위해, 아니 아들의 ‘성적’을 위해 안달인 엄마. 과거 유망한 국가대표 수영선수에서 진정한 가르침이란 명목 아래 체벌을 서슴지 않는 수영코치가 되어버린 광수. 영화 속 메시지는 인물만 훑어보아도 금세 느껴질 만큼 적나라하다. 영화 속 엄마와 수영코치 같은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놓치고 있는 그것, 수영장을 메운 푸른 빛을 쫓아 유영하는 아이의 순수한 꿈은 적어도 영화 <4등>에서 만큼은 오롯이 성장했다.

<인디포스트> 관련 기사 ‘앞으로 계속 주목해야 할 시선들 - 국가인권위원회 ‘시선 프로젝트’’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블록버스터, <고스트 버스터즈>

1984년 개봉한 원작이 흥행한 뒤 32년만에 리메이크한 영화의 설정은 원작과 같다. 뉴욕을 박살내려는 악당과 유령, 이들을 소탕하려는 괴짜 과학자들의 방어, 대결 속 튀어나오는 기발한 유머 코드. 오히려 몇 백배 발전한 CG를 보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유일하게 달라진 건, 4인조 남성 과학자와 백치미 넘치는 여성 비서의 성별이 여성 과학자와 남성 비서로 바뀌었다는 것. 이 젠더 스와프(Gender Swap)는 <고스트 버스터즈>의 필연적 진화다. 하지만 적을 물리치고 지구를 구하는 여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는 개봉 전부터 들끓었고, 어릴 적 추억의 영화였던 원작을 사랑하는 남성 마니아들은 평점 테러를 감행하며 어깃장을 놨다. 주인공 중 하나인 패티 역의 레슬리 존스를 향한 공격은 그저 ‘여성혐오’이자 ‘인종 비하’에 다름없었다. 우리는 어떠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5월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은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살해)’, 그리고 여성혐오와 성차별에 관해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각성을 일으켰고, 여성들의 ‘말하기’는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을 넘어 SNS를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로 이어졌다.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이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다.

<고스트 버스터즈>(2016) 예고편 [바로가기]
<고스트 버스터즈>(1984) 예고편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재개봉, <록키 호러 픽쳐쇼>

리처드 오브라이언이 각본을 쓰고, 짐 셔먼이 연출한 이 문제작이 태어난 해는 1975년이다. 그리고 4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록키 호러 픽쳐 쇼>가 간직한 수많은 함의와 문제 제기는 해소되었을까. 자유와 권리를 향한 외침은 잦아들었을까. 무려 40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앞으로 가고 있을까, 멈춰있을까, 아니면 후퇴하고 있을까. 이 묵은지 같은 영화가 이제 와 선사하는 것들엔 분명히 서글픔도 끼어 있다. 여전한 것이 있다면, 지금 들어도 새로운 음악과, 수많은 예술에 모태가 되었던 게 분명한 감각과, 영원히 바래지 않을 배우들의 연기다. 잘 익은 묵은지는 맛있고, 한 번 명작은 영원히 명작이다.

<인디포스트> 관련 기사 ‘40년 묵은 영화의 놀랍도록 새로운 감각’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애니메이션, <벨빌의 세 쌍둥이>

적은 상영관 수에도 프랑스에서 이례적인 흥행 기록을 세운 실사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2013)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실뱅 쇼메 감독은 명실공히 ‘2D 애니메이션계의 살아있는 거장’으로 불린다. 그러한 거장의 출발점이 되어준 작품 <벨빌의 세 쌍둥이>(2003)가 마침내 올해 국내 스크린에 정식으로 띄워졌다.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후 무려 13년 만이다.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영화관들은 실뱅 쇼메 감독의 전작들을 재상영했고, 실뱅 쇼메 감독은 제18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벨빌의 세 쌍둥이>가 실뱅 쇼메에게 달아준 거장이라는 이름표는 13년을 뛰어넘어 올해 더욱 화려하게 빛났다.

<벨빌의 세 쌍둥이> 오프닝 영상 ‘Belleville Rendez-vous’ [바로가기] 
<인디포스트> 관련 기사 ‘따스한 어둠이 내린 실뱅 쇼메의 비밀정원’ [바로가기] 

 

PICK!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자백>

<자백> 예고편

한국의 저널리스트 최승호 감독이 한국, 중국, 일본, 태국 4개국을 넘나들며 40개월간 간첩 조작 사건의 실체를 담아낸 미스터리 액션 추적극이다. <자백>은 2013년 서울시공무원간첩조작사건을 파헤치는 동시에 앞서 국정원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무고한 탈북자와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도 폭넓게 다룬다. 특히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거침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스파이 조작 사건에 대해 인터뷰를 시도하는 감독의 모습은 ‘한국의 마이클 무어’라 칭하고 싶을 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간첩 조작이 일어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이 땅에서 강압으로 날조된 피해자들의 자백이 아니라, 진짜 가해자들의 자백을 들을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이 시점에 이르러, 지난 몇 년간 외로운 싸움을 벌이며 영화를 만들어 온 최승호 감독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Editor
Editor
Edi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