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상영이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던 그 순간, ‘션 베이커(Sean Baker)’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나는 알아버렸다. 신작을 챙겨봐야 할 감독이 하나 늘었구나.
사춘기 소년들에 관한 영화 <포 레터스>로 데뷔해 중국인 이민자를 다룬 <테이크 아웃>으로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주목을 받고, <탠저린(Tangerine)>으로 2015년 선댄스 영화제를 발칵 뒤집어 놓은 후, 이번엔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런던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을 받기까지 어쩜 이렇게 한 번도 내 눈에 띄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동안 게을렀던 스스로를 탓할 뿐.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이라도 그를 알게 되었다는 것.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식상한 격언은 접어두자. 이제라도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고 신작을 챙겨볼 재미가 남아있으니, 그가 거장이 되는 모습을 지켜볼 일이 남아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게다가 그는 4월 12일부터 15일까지 내한한다! 이보다 천만다행일 수가 없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Florida Projectㅣ2017ㅣ출연 윌렘 대포, 브루클린 프린스, 브리아 비나이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본 사람이라면 속은 기분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디즈니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라는 홍보문구에 속고, 파스텔 색감의 포스터에 속고.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인 줄 알고 상영관에 들어섰는데 정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를 보게 된 기분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속았다는 기분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때론 기대와 예상에게 뒤통수 정도는 맞아줘야 놀라움도 가슴 벅찬 감동도 극대화되곤 하니까.

사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면서 놀라운 점은, 포스터나 예고편에서 기대한 것과 실제 영화가 다르다는 것 하나뿐이 아니다. 집이 없어 모텔을 전전하는 홈리스들의 삶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전시한다거나 그들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감독의 시선은 정말이지 놀랍다. 동정도 연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공감할 뿐인 감독의 그런 시선은 아마도 이전까지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더욱 그러리라. 배우들은 또 어떤가. 연기를 잘한다는 차원을 넘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그 생생한 연기도 참으로 놀라울 따름. 심지어 ‘무니’ 역의 브루클린 프린스와 무니의 엄마인 ‘핼리’ 역의 브리아 비나이트는 물론 ‘스쿠티’ 역의 크리스토퍼 리베라, ‘젠시’ 역의 발레리아 코토 등의 배우들 모두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걸 알고 나면 이 감독이 대체 배우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의문에 휩싸일 정도이다.


아이들을 화면에 담을 때 카메라를 항상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영화의 단 한 장면도 카메라가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것, 3년 가까이 US 하이웨이 192 도로를 오가며 그곳 사람들의 삶을 조사했다는 것, 그래서 당시 한 모텔의 매니저였던 존 매닝을 바비 캐릭터의 모델로 삼았다는 것, 아동심리학자들에게 조언을 받아 아역 배우들에게 각자의 대사만 보여주고 촬영을 진행했다는 것 등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가다 보면 이 영화가 주는 놀라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근원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공식 예고편

 

 

<탠저린>

Tangerineㅣ2015ㅣ출연 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 마이아 테일러


크리스마스이브에 출소한 트랜스젠더 ‘신디’.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인 친구 ‘알렉산드라’에게 자신이 교도소에 있는 동안 남자친구 ‘체스터’가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막장 드라마만은 찍지 말아 달라는 알렉산드라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상대가 된 여자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는 주인공 ‘신디’. 신디와 알렉산드라, 그리고 체스터가 펼치는 떠들썩한 크리스마스이브의 막장 드라마가 사실상 이 영화 줄거리의 전부다.

하지만 사실 <플로리다 프로젝트>도 디즈니 월드 건너편 싸구려 모텔에 사는 아이들의 신나는 모험담이 영화 내용의 전부이지 않았던가.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탠저린> 또한 길지 않은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막무가내로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신디가 한심하다가도 영화 끝 무렵에 가면 이내 그런 신디마저 안쓰럽고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면, ‘도넛타임'에서의 한바탕 떠들썩한 대소동에 소리내어 웃다가 마지막 장면의 알렉산드라와 신디의 모습에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201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왜 그토록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했는지 이쯤되면 이해가 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속 두 트랜스젠더도 이 영화가 데뷔작. 감독이 취재를 하다가 지역의 LGBT 센터에서 만난 실제 트랜스젠더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좋은 배우들을 우연히 캐스팅하게 되어 션 베이커 감독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글쎄, 운도 반복되면 실력이라 하지 않던가.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아역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고, <탠저린>의 트랜스젠더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고, 할 수만 있다면 션 베이커 감독의 연기 디렉팅 능력을 훔치고 싶을 지경이다.

아이폰으로 촬영하는 모습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폰 5S만으로 찍었다는 것. 아이폰으로 찍게 된 계기는 부족한 예산 때문이었지만 그 덕분에 신인배우들이 연기할 때 카메라를 덜 의식할 수 있었고, 생생한 현장감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보다 훌륭한 예가 또 있을까. 애플은 아이폰만으로 이토록 근사한 영화를 만들어낸 션 베이커 감독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탠저린> 예고편

 

 

<스노우버드>

Snowbirdㅣ2016ㅣ출연 애비 리 커쇼


2016년 S/S 컬렉션의 패션 필름으로 활용하기 위해 패션 브랜드 겐조는 션 베이커 감독에게 단편영화 한 편을 의뢰한다. 상업광고나 단편영화에 관심이 별로 없었음에도 새롭게 실험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낀 션 베이커 감독은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단편영화가 <스노우버드>. 매드 맥스에서 활약했던 애비 리 커쇼(Abby Lee Kershaw)가 역할을 맡은 ‘테오’라는 여자가 본인이 만든 케이크를 들고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괴짜 노인들을 찾아다니는 내용이 전부인 12분짜리 이 단편영화에서도 션 베이커 감독의 특징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영화의 배경은 스노우버드(추운 기후에서 살다가 겨울이면 따뜻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용어)들이 사는 샌디에고 북동쪽 소노란 사막의 슬래브 시티. 전기도, 깨끗한 물도, 하수구도, 변기도 없는 버려진 땅이자 무단 점유자들이 사는 곳. <플로리다 프로젝트>처럼, <탠저린>처럼 <스노우버드>에서도 션 베이커 감독은 소외된 사람들의 소외된 공간에 집중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실제 지역 주민들을 배우로 출연시킨다.

게다가 이번에도 역시 <탠저린>에서 그랬듯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폰만을 활용해 촬영을 한다. 아이폰이 신인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경험을 참고한 것이다. 주인공 테오의 여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여운을 주는 결말 또한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타렛>과 같은 션 베이커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한국어 자막을 구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보고 나면 션 베이커 감독의 개성을 집약해놓은 이만한 엑기스가 또 있을까 싶다.

 

단편영화 <스노우 버드>

 

 

<스타렛>

Starletㅣ2012ㅣ출연 드리 헤밍웨이, 베세드카 존슨, 스텔라 매브


친구 집에 얹혀살지언정 인테리어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제인’은 동네 창고 세일을 찾아다니며 인테리어 소품을 구한다. 그러던 중 한 할머니에게서 꽃병으로 쓸 만한 보온병을 산 제인. 그리고 그 보온병 안에 있던 엄청난 금액의 돈뭉치. 돈뭉치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제인은 보온병의 주인이었던 할머니 ‘세이디’와 친해지기 위해 접근한다.


젊은이와 괴팍한 노인의 우정을 다룬 영화는 흔하다. 둘이 친해지는 과정도 눈에 그려지듯 선할 지경이다. 하지만 <스타렛>은 그런 전형적인 기대를 하나하나씩 배신하며 전개해나간다. 둘의 감정을 과장하지도 일부러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소소하게 쌓여가는 우정 속에 마지막 반전의 여운이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증손녀 드니 헤밍웨이가 제인 역할을 맡았다는 것, 드레스가게를 운영하던 1925년생 베세드카 존슨이 YMCA 라커룸에서 우연히 캐스팅되어 결국 이 영화가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었다는 것, 제인이 기르는 수컷 치와와이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강아지 ‘스타렛’이 실제로 션 베이커 감독이 키우는 강아지라는 것과 같은 영화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그저 거들 뿐이다.

영화 스타렛 예고편

 

이제야 뒤늦게 션 베이커 감독을 알게 된 팬 주제에 션 베이커 감독이 부디 본인의 재능을 아끼지 말고 많이 많이 오래오래 영화를 찍어주었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 앞으로 더 유명해지더라도, 더 많은 영화를 찍게 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따스하게 바라봐주는 그 시선은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함께.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 예고편
<테이크 아웃> 예고편

 

메인 이미지 via ‘Business Insider’ 

 

 

ㅣ필자소개ㅣ
ANSO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카피 쓴다는 핑계로 각종 드라마, 영화, 책에 마음을, 시간을 더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