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을 것만 같던 강추위와 칼바람이 가시고 축축한 봄비가 요 며칠 굳은 땅을 적셨다. 벌써 수십 차례 겪어 온 계절의 변화인데도 그 시작엔 매번 낯선 설렘이 동반한다. 옷장 속 묵혀둔 봄옷을 다시금 꺼내 놓는 일, 겨우내 끔찍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전기요를 정리하는 일, 올라간 온도 탓에 더 수시로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일 말고도 이런 주제는 어떨까. 각자의 기억 속에 각인된 계절의 영화들을 소환해 보는 것 말이다.

어떤 영화로부터 완연한 계절감을 느끼면 왠지 그 영화에 푹 스며들게 되는 기분이다. 각 계절의 온도와 습도는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껴왔던 익숙한 감각들이다. 계절의 정경을 스크린 속으로 불러온 영화들은 각자가 경험했던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기억의 어디쯤을 자극한다. 관객들은 4D 영화에 버금가는 체험 속으로 이동하면서 현실에 없을 판타지의 세상 속으로 보다 쉽게 진입하기도 하며, 혹한기의 배경 위에 얹어진 냉정함의 세계로, 한여름의 눅진하고 목마른 이야기로 한 발 더 들어가기도 한다.

필자의 사사로운 리스트는 이렇게 골랐다.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설렘과 함께 맞이하는 봄기운 <4월 이야기>, 전방위적으로 갈증을 노래하는 <흔들리는 구름>, 늦가을의 이국적인 정취가 깃든 <만추>, 새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릴러 <파고>,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아우른 전원 미식 라이프 <리틀 포레스트>까지. (‘봄’에서 시작해 ‘봄’으로 끝나는 모 감독의 영화는 <PD수첩>을 시청한 후 제외했다.) 계절 앞에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영화들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다. 성큼 다가온 봄을 만끽하기에 앞서 이런 식의 수다 한바탕도 즐겁지 않을까.

 

이와이 슌지 <4월 이야기>(1998)

<4월 이야기> 스틸컷

<4월 이야기>의 스토리 라인은 단조롭다. 홋카이도 출신의 ‘우즈키’(마츠 다카코)는 도쿄의 외곽에 위치한 무사시노 대학의 신입생이 된다. 밀레니엄의 시대로 진입하기 전, 우즈키는 대학생으로의 새 출발을 시작하며 자취방을 꾸린다. 영화는 온통 새로운 것들로 둘러싸인 우즈키의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출발을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1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으로 간결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처음’이라는 어색함과 몽글몽글한 감수성이 충만한 매력적인 작품이다 <4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첫사랑의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 중 하나가 되고 있다.

<4월 이야기> 오프닝 신

 

차이밍 량 <흔들리는 구름>(2005)

<흔들리는 구름> 스틸컷

극심한 가뭄으로 말라가는 대만의 타이페이. 갈증과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흔들리는 구름>은 생소한 화법으로 전개되는 뮤지컬 영화다. 극심한 물 부족 탓에 즙이 많은 수박이 타는 목마름을 메우고, 심지어 초반부에는 수박이 등장하는 외설적인 포르노 신이 ‘갈증’의 감각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여행 가방의 열쇠를 잃어버린 ‘싱차이’(양귀미)와 포르노 배우 ‘샤오캉’(이강생). 고독한 이들의 메마른 사랑은 후덥지근한 여름의 습기와 조응하며 <흔들리는 구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흔들리는 구름>의 한 장면

 

김태용 <만추>(2010)

<만추> 스틸컷

수인번호 2537번 ‘애나’(탕 웨이)는 어머니의 부고로 3일간의 휴가를 받는다. 시애틀로 가는 버스에서 그녀는 차비를 빌리는 ‘훈’(현빈)을 만난다. 낯선 여자들에게 일회성의 사랑을 서비스하는 직업을 가진 그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7년 만에 밖으로 나온 애나는 변해버린 모든 것에 낯설고, 그런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훈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안개 낀 시애틀의 짧은 계절에 스치듯 지나가는 이들의 시한부적 만남. 표정 없는 탕 웨이의 묵직한 연기, 이국적인 풍경 속에 교감하는 두 이방인이 김태용의 <만추>에서 시네마틱한 장면들을 수놓는다.

영화 <만추> 예고편

 

코엔 형제 <파고>(1996)

<파고> 스틸컷

폭설이 내리는 미국 노스다코타주 파고. 자동차 세일즈맨 ‘제리’(윌리암 H. 마시)는 부유한 장인에게서 돈을 착복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 ‘진’(크리스틴 러드러드)을 유괴하기로 작당한다. 제리는 수행자로 ‘칼’(스티브 부세미)과 ‘게어’(피터 스토메어)를 소개받고 납치를 의뢰한다. 8만 불을 나눠 갖기로 한 이들은 진을 납치하는 데 성공하지만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뒤엉키기 시작한다. 무감한 살인에 설경 위로 낭자하게 흩어지는 피의 현장은 코엔의 다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코엔 형제의 장기인 염세와 냉소의 시선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이번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용의자를 쫓는 경관을 연기했다.

영화 <파고> 예고편

 

모리 준이치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4)
<리틀 포레스트 2: 겨울과 봄>(2015)

<리틀 포레스트 2: 겨울과 봄> 스틸컷

이가사리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했으며, 현재 한국에 개봉 중인 <리틀 포레스트>가 이 작품을 리메이크했다. 일본의 어느 농촌 코모리에 혼자 살고 있는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제 손으로 일군 채소들로 정성스러운 식사를 준비한다. 이치코의 독백이 차분하게 녹아있는 요리 과정과 어머니(키리시마 카렌)와의 삶을 회상하는 장면들이 정갈하게 교차한다. 어느 일류요리에 뒤지지 않을 이치코의 소박한 밥상과 사계절 자연이 뿜어내는 건강한 기운은 어떤 자극적인 소재 없이도 감동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리틀 포레스트 2:겨울과 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드는 신

 

Writer

예측 불가능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을 닮은 영화를 사랑한다. 우연이 이끄는 대로 지금에 도착한 필자가 납득하는 유일한 진리는 '영영 모를 삶'이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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