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교류’라는 말은 다소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가 시작되던 작년부터 지금까지 1년 넘게 진행 중인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그 딱딱한 표현보다는 전시, 공연, 영화 등 여러 장르에서 다채로운 문화 콘텐츠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년 7월 시작한 ‘영국 내 한국의 해’는 오는 6월까지 영국에서 계속되고, 지난해 2월 시작한 ‘한국 내 영국의 해’는 오는 3월 말로 마무리된다. 그동안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영국 거장들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영국 문화 프로그램을 만났는지, 그리고 남은 프로그램은 무엇인지 살펴봤다.

 

기억해보는 순간들, 영국 아티스트들과의 만남

아이작 줄리언

아이작 줄리언, <Playtime> ⓒIsaac Julien and Victoria Miro Gallery, London


‘한국 내 영국의 해’가 시작되자마자 굉장한 이름이 등장했다.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 영국을 대표하는 설치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그는 런던에 기반을 두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1991년 장편영화 데뷔작 <젊은 영혼은 반항한다(Young Soul Rebels)>로 칸 영화제에서 비평가주간상을 받았고, 세계 여러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전시했으며 뉴욕 현대미술관(MoMA) 등 세계 무대에서 전시 활동도 활발히 이어오고 있다. 한영 상호교류의 해 일환으로 개최한 그의 한국 최초 개인전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플레이타임>이란 제목으로 열렸다. 대표작 <Playtime>(2014)을 비롯해 <Kapital>(2013)과 <The Leopard>(2007)을 선보인 자리. 그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자본에 관한 낭독 공연을 한 바 있는데 작년 봄 한국에서 이 전시를 통해 자본, 미술시장, 경제위기 등에 대한 근본적 이야기를 꺼내놨다.

 

마이클 윈터바텀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 ⓒMichael Winterbottom


전주국제영화제에는 스페셜 포커스로 ‘마이클 윈터바텀: 경계를 가로지르는 영화작가’ 프로그램을 마련해 영국 영화감독 마이클 윈터바텀(Michael Winterbottom)의 작품 세계를 조명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거장으로 꼽히는 그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10편을 상영했고, 그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하며 영화 팬들을 설레게 했다. 특히 큰 관심을 모은 것은 문제작으로 꼽히는 <나인송즈>의 무삭제 오리지널 버전을 처음으로 상영한 것. 또 그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거머쥔 영화 <관타나모 가는 길>, 그리고 최근작인 <온 더 로드>까지 다양한 작품으로 한국 관객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웨인 맥그리거

웨인 맥그리거의 무용 작품 <아토모스> ⓒRavi Deepres


영국 현대무용계를 대표하는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도 한국을 찾았다. LG아트센터에서 그의 작품 <아토모스>를 공연한 것.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컴퍼니 웨인 맥그리거의 예술감독이자 2006년부터는 영국을 대표하는 발레단인 로열 발레단의 상주 안무가로 활약하고 있으며, 파리 오페라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 등 세계 최고의 발레단과 작업해왔다. 한국의 무용 관객들에겐 아주 반가운 공연이었던 <아토모스>는 그가 영국의 ‘스튜디오 XO(Studio XO)’와 협업한 작품. 무용수들의 몸에 센서를 부착해 그들의 움직임과 생체정보의 변화를 기록하고 영상, 사운드, 조명 등의 데이터를 원자화해, 3D 안경을 쓰고 무용을 관람하는 신선한 경험을 제공했다.

 

탈리스 스콜라스

탈리스 스콜라스 ⓒEric Richmond


특별한 고음악 공연도 있었다. 영국를 대표하는 11인조 성악단체 탈리스 스콜라스(The Tallis Scholars)는 13년 만에 내한해 LG아트센터와 수성아트피아 무대에서 노래했다. 지휘자인 피터 필립스가 1973년 창단해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이 단체는 고음악 분야에서 많은 상을 받았고, 그라모폰지의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공연에서는 단체 이름의 근원이 된 토마스 탈리스의 미사곡와 몬테베르디의 4성부 미사 등 한국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르네상스 음악을 들려주며 영국의 합창전통을 선보였다.

 

윌리 도허티

한국을 찾은 윌리 도허티 작가


북아일랜드 출신의 현대미술작가 윌리 도허티(Willie Doherty)는 아트선재센터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1994년과 2003년 두 번에 걸쳐 영국의 세계적 미술상인 터너상 후보에 올랐고,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북아일랜드 파빌리온의 대표작가로 전시한 인물. ‘2017 아트선재 프로젝트 #3: 윌리 도허티 – 잔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전시에서 그의 영상과 사진 작업을 만날 수 있었다. 대표작인 영상작품 <잔해>(2013)는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분쟁을 담은 작품. 첫 한국 전시에 맞춰 한국을 찾은 그는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관람객들과 자신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17 아트선재 프로젝트 #3 윌리 도허티 _ 잔해’ 전시 설치 전경

 

리처드 해밀턴

리처드 해밀턴, <The citizen>(1985)


최근 행사 중 하나인 ‘리처드 해밀턴: 연속적 강박’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20세기 후반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히는 리처드 해밀턴의 아시아 최초 전시였다. 런던에서 자라고 공부한 그는 영국 팝아트의 대부로 꼽힌다. 한국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1960년대의 미국 팝아트 작가들이라면 리처드 해밀턴은 1950년대 시작된 영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 그는 2011년 작고했고 영국에서는 이미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는데, 이번 전시는 그의 작품을 한국에서 만나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작된 회화, 드로잉, 판화 등 90여 작품이 특정 작품군과 연작을 중심으로 전시됐고, 가전제품이나 대중문화 이미지 등 그가 천착한 소재가 어떻게 변주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남은 것은 다양성, 아름다운 다름

'페스티벌 아름다름 아름다운 다름' 포스터


아직 ‘한국 내 영국의 해’는 끝나지 않았다. 특히 무용 공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챙겨봐야 할 프로그램들이 남아있다. 3월 9일부터 23일까지 2017-18 한영 상호교류의 해의 폐막 행사로 ‘페스티벌 아름다름: 아름다운 다름’이 열린다. 한국과 영국의 장애 예술가 및 비장애 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한 결과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위해 예술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공·空·Zero> 포스터


먼저 3월 17~18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열리는 <공·空·Zero>은 영국의 대표적 장애인 예술공연단체인 마크 브루 컴퍼니의 예술감독 마크 브루(Marc Brew)와 ‘2017 비평가가 주목하는 안무가’로 선정된 김보라의 컬래버레이션 무용 작품. 영국 작곡가 앵거스 맥레이(Angus MacRae)와 오디오 디스크라이버 엠마 제인 맥헨리(Emma Jane McHenry), 무대세트 디자인에는 김종석, 조명 디자인에는 이승호가 참여하는 등 한국과 영국의 제작진으로 구성됐다. 참여 아티스트들의 공통 관심사인 ‘제약, 신체, 시간’에 대한 작품으로,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으로 공연을 설명하는 오디오 디스크립션도 제공된다.

<공·空·Zero>을 합작한 마크 브루와 김보라 ⓒSusan Hay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로 구성된 세계적인 영국 무용단 칸두코 댄스 컴퍼니(Candoco Dance Company)와 한국의 안무가이자 무용가인 안은미는 3월 17일과 18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신작 <굿모닝 에브리바디>를 공연한다. 안은미라는 이름을 아는 이들이라면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를 반영해온 그녀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즐거운 자리가 될 것.

칸두코 댄스 컴퍼니와 안은미 ⓒ이진원


사진전도 있다. 3월 9일부터 23일까지 장애인문화예술센터 이음에 자리한 이음갤러리에서 장애예술 사진전 ‘춤을 추는 천백만 가지 이유’가 열린다. 한영 상호교류의 해가 한국과 영국의 장애 아티스트와 비장애 아티스트들이 만난 특별한 합작품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앞으로의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본다는 의미. 이런 폐막 프로그램은 문화교류의 최종 목적지가 곧 ‘다양성’이라는 결론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영 상호교류의 해 홈페이지 

 

 

Writer

잡지사 <노블레스>에서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사람과 문화예술,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는 에세이 <마음이 어렵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여행서 <Tripful 런던>, <셀렉트 in 런던>이 있다.
안미영 네이버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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