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불행의 범람은 오히려 사람들을 고통에 무뎌지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어 조롱받기 시작했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햄버거를 먹고, 성폭력을 고발하는 여성들 앞에서 점심 식사 메뉴로 ‘미투’를 외치는 모습이 바로 그 단적인 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다루는 예술 작품들은 항상 여기에서 비롯된 윤리의 문제에 봉착한다. 창작자가 불행을 전시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이것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론적인 물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많은 불행들을 전해 듣지만, 그 불행들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차 가공되면서 그 단독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정보들로 추락하고 만다. 소설가들은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 내야 한다. 그때 환상이라는 장치가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황정은 작가의 소설 <백의 그림자>의 주석에서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며, 작품 속에서 불행을 다루는 방법으로 ‘환상’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평범한 회사원인 그레고리가 벌레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그의 불행을 기억했듯이, 많은 창작자들은 불행에 환상을 덧칠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애도해왔다. 왕따 소녀에게 염력을 쥐여주고, 외톨이 소년에게 괴물이 속삭이는 등의 강렬한 환상으로, 타인의 불행을 가슴에 새기는 영화를 소개한다.

 

1. <토토의 천국>

<토토의 천국> 스틸컷

영화 <토토의 천국>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전혀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어린 ‘토토’는 자신이 옆집 부잣집 아이 ‘알프레도’와 바뀌었다고 믿으며 평생 그에게 박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영화는 토토가 가진 불행을 극단적인 환상으로 다루면서,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연약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이 부분은 토토의 첫사랑이었던 친누나 ‘앨리스’가 죽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앨리스는 토토가 자신과 알프레도의 관계를 질투하자, 토토에 대한 사랑을 맹세하며 알프레도의 집으로 기름통을 껴안고 뛰어들어 자살한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불행은 토토의 열등감을 단독적으로 풀어내며, 관객들이 그 어마어마한 비극의 크기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영화 <토토의 천국> 예고편

<토토의 천국>에서 환상은 모두 토토의 감정선에 따라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어딘가 이지러지고 괴이하게 아름다운 형태로 영화 곳곳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환상들은 자꾸만 현실과 교차하고, 처음에는 사실 여부를 가려내려고 노력하던 관객들도 점점 그 허상의 것을 토토의 내부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환상은, 토토의 불행을 넘어 ‘토토’ 그 자체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2. <몬스터 콜>

<몬스터 콜> 스틸컷

영화 <몬스터 콜>은 주인공 소년, ‘코너’의 내면을 형상화한 환상의 존재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여느 판타지 영화와는 다르게 실체화된 몬스터는 코너 대신 그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때려눕히거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드러나지 않는다. 코너는 이 몬스터가 죽어가는 엄마와 자신을 구원하러 왔다고 믿지만, 몬스터는 아무것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그는 그저 코너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여기에서 <몬스터 콜>은 환상을 통한 ‘진짜 치유’를 얘기한다. 몬스터는 결국 코너 그 ‘자신’일 뿐이다. 코너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성장의 걸음을 내딛게 된다.

몬스터와의 첫 만남 장면

영화 <몬스터 콜>에서 환상은 마치 ‘안경’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는다. 슬픔과 분노에 빠져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 왜곡해서 보게 될 때, 코너는 이 안경을 통해 결국 현실과 진짜 마음을 마주한다. 환상은 현실의 그 무엇을 대변해주지 않지만, 결국 현실을 깨닫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 ‘안경’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전달되고, 관객들은 이것을 통해 코너의 상처받은 내면을 또렷이 보게 된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코너의 상실과 외로움에 단독성을 부여하고, 그것에 깊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3. <캐리>

<캐리> 스틸컷

영화 <캐리>는 공포영화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 ‘캐리’가 가진 불행을 나열하기 바쁘다. 광신도인 캐리의 어머니는 캐리가 생리를 시작하자, 그에게 악마의 저주가 쓰였다고 하며 광적으로 분노한다. 집에서는 어머니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캐리가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영화는 폭력과 불행에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캐리에게 ‘염력’이라는 환상을 쥐여준다. 생리를 시작하고 난 뒤, 캐리는 자신이 그저 생각만으로 물건을 옮길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관객들은 캐리가 초능력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그의 분노가 언제 폭발할 것인지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게 된다. 캐리는 초능력자가 되어서야 약자의 포지션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실체를 응징할 힘을 상징적으로 갖게 된다. 그리고 졸업식 날, 끝까지 자신을 기만하는 아이들을 처절하게 죽이기 시작한다.

졸업식에서 분노한 캐리

이 영화에서 환상은 관객들이 오히려 캐리와 자신을 분리해서 보도록 유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단순한 통쾌함보다는, ‘선악’에 대한 질문과 찝찝함이다. 관객들은 캐리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관음하게 되지만 엔딩에서 나타나는 캐리의 친구 ‘수’의 환상을 통해, 분노와 광기는 계속해서 대물림되며, 결국 ‘캐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영화의 부제가 ‘you will know her name’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범람하는 불행 속에서 그 ‘단독성’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그 정보를 소비하는 우리에게도 분명히 필요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영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창작물들을 볼 때, 그 속에 등장하는 환상이 우리의 가슴에 새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느껴보자. 그 안에 다져진 불행과 타인의 고통이 더욱 선명하고 ‘단독적이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메인 이미지 영화 <캐리>(2013) 리메이크 포스터 via ‘Quench’ 

 

Writer

아쉽게도 디멘터나 삼각두, 팬텀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이야기를 만들고 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으스스한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마니악한 기획들을 작당합니다.